우리 결혼해요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합니다

훈훈하니 2023. 2. 8. 21:55

내가 지금껏 들어본 가장 멋진 사랑 고백이 있다. 잭 니콜슨과 헬렌 헌트 주연의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에 나온다.

 

작가 멜빈(잭 니슨)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의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걷는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져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이러한 신경질적인 성격 탓에 모두들 그를 꺼린다. 그런 그의 삶에 단골식당의 웨이트리스 캐럴(헬렌 헌트)이 들어온다.

 

세상에 마음을 닫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까지 하던 멜빈은 캐럴로 인해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 대화를 나누고, 어려운 사람을 이해하며 도와주는 노력을 기울이는 변화를 겪는다.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변화를 인지한 멜빈은 스스로도 뿌듯하고 기쁘고, 이 모든 변화가 캐럴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멜빈은 캐럴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는 고백.

이런 사랑 고백을 할 대상이 있다는 것도, 누군가로 인해 이런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도 정말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에게도 이런 ‘멋진 일’이 일어났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연애’를 하고 있는 여자 친구. 혼자서만 속앓이 해야 하는 그녀를 위해 난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고, 동종업계 선배로서 일도 가르쳐 주려고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잘하고 있다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녀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이 많다고, 사적인 것까지 가르치려고 들지 좀 마요.”

 

잘 되라고 도와주고 있는데, 가르치려 든다고?

난 그녀의 말이 이해가 안됐다.

 

“알려주는 거잖아. 이렇게 해봐. 그게 너한테 좋아.”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항변했다.

 

“불이익이 와도 내가 감내할 테니까, 자기의 방식을 나한테 강요하지 말라고요.”

 

"... ..."

 

어느새 내가 여자 친구에게 잔소리꾼이 돼 있다는 걸 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인턴 과정을 마치고 정식 기자로 입사한 그녀에게는 직속 사수 선배가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 무슨 일은 없는지 일일이 알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그녀의 모든 기사를 먼저 봤다.

 

그리고 누굴 인터뷰 한다고 하면...

 

‘자료는 잘 준비했니?’

‘뭘 물어 볼거니?’

‘이건 꼭 질문에 넣어야 한다.’

‘OO신문사 OOO기자 놈은 조심해라.’

 

나도 모르게 끝없는 참견과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첫마디는 꼭 이랬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꼰대가 돼 있었다. 여자 친구에게 내가 바로 그 꼰대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꼰대 자가테스트를 해보면 당시의 나는 10점이 넘어가는 중증 꼰대였지만, 정작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변명일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의 행동은 모두 그녀를 위해서였다.

 

언젠간 내 곁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잘한다는 소릴 들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고 싶었다. 기자가 꿈이었던 그녀가 내가 운영하는 작은 인터넷 신문사에 안주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대형 언론사로 가서 큰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단단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잘못 됐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미투나, 갑질 논란을 앞장서 보도하는 기자들의 세계야 말로 당장 버려야 할 구태가 팽배한 곳이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엔 신입가자가 들어오면 선배들은 가장 먼저 경찰서부터 뺑뺑이를 돌리고, 대면식이라는 이름으로 신고식을 치르게 하고, 폭탄주를 말아 먹이는 문화가 있었다.

 

특히나 까탈스러운 직속 선배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선배 갑질은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였다. 문제는 나 또한 그 분위기에 젖어 있어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살았다는 거다.

 

부드러운 말투로 가장하고 있었지만, 난 은연중에 그녀를 나보다 한참 어리고, 내 말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까마득한 후배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자신을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자 친구가 지적하기 전까지, 나에게도 그런 습성들이 배어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었다. 워낙 자연스럽고 익숙해 있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전형적인 ‘구식 남자’였다. 내 성장기 또한 한몫했던 것 같다.

우리집은 엄격한 가부장적 규칙대로 움직였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과 아들 셋 뒷바라지만 하며 평생을 살았다.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한테 돈을 벌어오게 하느냐고 믿는 남편 덕분에 어머니의 바깥 활동은 꿈도 못 꿨다. 집안에서 아버지는 하늘, 그다음은 장남인 나였다. 동생들에게 나는 폭군처럼 군림했다. 내가 집 안팎을 드나들 때 동생들은 나에게 현관에 서서 90도로 인사를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학창 시절 새벽같이 등교를 하는데, 동생들은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게 어찌나 분했던지 난 자고 있는 두 동생들을 패주기도 했다. 동생들은 김치만 먹고, 나에겐 계란말이가 주어지고, 동생들은 고무신을 신을 때, 난 구두를 신을 수 있었다. 이건 자랑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자라온 사람들이 지금은 중년이 되었지만 주변에 종종 있었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묻어가고 싶진 않다. 이 부분은 성인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도 난 동생들에게 미안함이 가시질 않는다.

 

어쨌든 당시에 심부름 같은 건 언제나 동생들 몫이었다. 장남 '특권'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장했다. 동생들에겐 내 말이 곧 법이었다.

 

그런데 그녀와 연애를 하면서 문제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도통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남자였다. 그래도 가족 안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소통을 하지 않고 내 뜻대로 일을 밀어붙일 때, 부모님, 특히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이 내 기분을 살피고 알아서 나한테 맞춰줬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이 부족했음에도 그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써 심부름이나 애정표현을 하지 않아도 됐었다.

 

당시의 나의 대화법은 이런 식이었다. ‘내가 신입 일 땐 말이야~’로 말문을 열고, 무용담 같은 경험들을 쏟아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전형적인 ‘꼰대식 화법’이었다.

 

꼰대 화법에서 벗어나 타인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것, 그게 내 앞에 놓인 과제였다. 더 힘든 건, 내가 꼰대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꼰대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내가 꼰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남이 하면 꼰대질이지만 내가 하면 애정이고 충고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신보다 약하다거나 어리다는 마음이 내재돼 있는 상대와 말을 섞는다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상대가 꼰대질로 느끼면 꼰대 밖에 되질 않으니까.

 

그녀에게 지적과 팩폭을 당하면서, 내 주장만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고,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내가 ‘내 말만 옳다고 우기는 꼰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틀린 건 빨리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게 아니라, 가만히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걸 마음에 새기며 실천해야 한다.

또 하나 벗어나야 할 것은 ‘허벌촐남’이다. ‘허벌촐남’은 그녀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허둥대고, 벌떡벌떡 화를 잘 내고, 촐랑거린다는 뜻이다. 이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그녀가 내 성격을 완전히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역시 그녀는 예리했다.

 

앞에서도 몇 번 얘기했지만, 난 진중 혹은 차분 이런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지금은 진상과 컴플레인의 차이를 잘 구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오갔다.

 

식당에서의 단골 대사는 직원 교육 어떻게 시킨 겁니까. 이유인 즉, 우리가 먼저 시켰는데 옆자리 음식이 먼저 나왔거나, 엉뚱한 메뉴를 가져다줬거나 한 경우다. 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항의할 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좋은 말투로 컴플레인을 하지만, 목소리가 높아질 때도 있었다. 그녀는 달랐다. 굳이 남들의 눈총을 사가며 기분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별거 아닌 일에 화내지 말라고, 그 종업원이 일부러 그랬겠냐고. 그리고 자기가 종업원이면 기분이 좋겠냐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함께 해외여행을 갔는데, 물론 빚 청산 후에 떠난 여행이다. 내가 허둥대느라 여권이 든 배낭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공항셔틀버스에 두고 내린 것인데, 나는 손님 물건이 있는지 확인 안 하고 출발해 버린 호텔 측에 항의를 했다.

 

내 모습에 그녀가 나에게 핀잔을 줬다. 난 화를 참지 못 하고,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냐며 호텔에 그녀 혼자 두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다행히 셔틀버스가 공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배낭은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나 혼자 밖으로 돌아다니다 한참 후에 호텔로 돌아와서는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당황하고 흥분된 상태라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고. 그녀는 내 사과를 그 자리에서 받아줬다.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그녀는 사과를 잘 받아줬다.

 

그러더니, 그녀 입장에서 기분이 나빴던 것 하나하나를 나에게 설명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에 있는 사람하고 왜 얼굴을 붉혀 야 하느냐. 차분히 기다리면 해결됐을 일인데 왜 흥분부터 해서 여행 온 기분을 망쳐 놓느냐.

 

처음에는 ‘미안하니까 그만해.’

이렇게 말했었던 나.

 

나중에는

‘내가 차분하지 못하고, 화부터 내서, 자기 기분까지 망치게 해서 미안해.’

이런 식으로 사과하는 방식도 바뀌게 되었다.

 

그녀가 지어준 ‘허벌촐남’이라는 별명에는 당황스러운 순간에 침착하지 못하다고, 나이 값 못한다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 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음을 차차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나는 한국 나이로 ‘반백살’이 되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불혹(不惑)도 지났고, 입시, 취업, 결혼 등의 과업을 이겨내며,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반백살의 나이가 아찔하게 다가올 때도 있지만, 왜 50살을 지천명이라 부르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조바심 나서 성급하게 화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더라.

 

이제는 기다려주고, 다른 사람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는 포용력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그녀가 나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기도 하다. 고맙다.

 

아무도 몰랐던 비밀연애를 결혼으로 성공시킨 전략이 담긴 책
 
우리 결혼해요
나이 서른아홉. 광고인이라는 꿈이 좌절되고, 거듭된 실직과 사업실패. 인생 막장(?)까지 경험한 후에 겨우 이름만 남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던 그 앞에 운명적인 여성이 나타났다. 신문사에 인턴으로 지원한 스물 한살의 당차고, 똑 부러지는 여대생. 첫눈에 호감을 느낀 주인공은 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둘은 비밀 연애를 시작한다. 사내연애, 띠동갑을 넘어선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이. 세상이 그런 연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너무나 잘 알기에 두 사람의 연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 때문에 비혼주의자 행세를 했던 남자가,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성숙하고 단단한 자아를 가진 여성을 만나, 철든 남자로 거듭나고, 꼰대 감성을 버린 소통 잘하는 남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수차례 어려움을 함께 이겨낸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짝이라는 걸 확신하고,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저자
이훈희
출판
푸른쉼표
출판일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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