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포즈 그 순간, 당신과 함께라면 '행복'이란 단어만 떠올라
인지도면에서 영화 <라라랜드>나 <비긴 어게인>에 밀릴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음악영화 중 최고의 걸작이라 꼽는 작품은 <위플래쉬>다.
'위플래쉬'란 영화 속에서 밴드가 연주하는 재즈곡의 제목이다. 중간 부분 드럼 파트의 더블타임 스윙 주법으로 완성된 질주하는 독주 부분이 일품으로 꼽힌다. 단어의 원 뜻은 '채찍질'이다.
- 평점
- 8.4 (2015.03.12 개봉)
- 감독
- 데미안 셔젤
- 출연
- 마일스 텔러, J. K. 시몬스, 멜리사 비노이스트, 폴 레이저, 오스틴 스토웰, 네이트 랭, 크리스 멀키, 수앤 스포크, 찰리 이언, 제이슨 블레어, 카비타 패틸, 에이프릴 그레이스, 데이먼 겁튼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음악대학 신입생 앤드류는 우연한 기회로 누구든지 성공으로 이끄는 최고의 실력자이지만, 또한 동시에 최악의 폭군인 플렛처 교수에게 발탁되어 그의 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폭언과 학대 속에 좌절과 성취를 동시에 안겨주는 플렛처의 지독한 교육방식은 천재가 되길 갈망하는 앤드류의 집착을 끌어내며 그를 점점 광기로 몰아넣으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다.
극 중에서 남자 주인공 앤드류는 니콜이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하고, 둘은 사귀기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자고 통보한다.
“난 위대해지고 싶어. 그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고. 우린 사귀면 안 될 것 같아.”
최고의 드럼 연주자가 되기 위해 드럼 연습에 매진해야 했고, 연애에 시간을 쓰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같은 상황을 성장욕구와 자기 확장성의 욕구로 설명한다. 연인 관계가 한 사람의 성장 욕구로 인해 깨진 거라고.
성장 욕구의 충족은 관계의 지속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인데, 사람은 자기 자신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더하고 자신을 확장하며 성장하고 싶은 근원적인 욕구, 자기 확장의 욕구(Self-expansion)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한 교수가 ‘자기확장’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 데, 주된 질문은...
- 배우자(애인)와 함께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는가?
- 배우자(애인)와 함께 살면서 당신이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그 결과,
사람들은 배우자를 통해 자기 확장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관계에 더 헌신적이고 만족한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자기 성장을 추구하고 있고, 당신의 배우자에 의해 그것을 이룬다면 이 과정에서 당신의 배우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배우자의 '자기확장'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도 매우 즐거운 일이 된다.
'자기확장'을 경험하는 부부일수록 결혼 생활이 더 오랫동안 그리고 행복하게 지속된다. 이것은 연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자기확장'이라는 개념이 본질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기확장'의 경험이 오히려 더욱 강하고 오래가는 관계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을 함께 나누고 서로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관계. 나도 그녀와 이런 연인 관계, 나아가서는 이런 부부가 되고 싶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사랑과 자기 성장이라는 딜레마는 언제나 나에게 결코 동시에 이룰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거대한 꿈을 위해 살았던 건 아니었지만, 내가 선택했던 쪽은 언제나 ‘자기성장’이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동시에 각자의 발전을 이뤄내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녀는 날 성장시켜주는 사람이다. 차분히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저질러 버리는 성격이었던 나는 그녀를 만난 이후, 차분히 앞날을 준비했다.
그녀에게 약속한 1년 후 내 회사의 사업권을 들고 국내 유명 IT 업체에 부서를 만들어 임원으로 입사했다. 많은 급여 덕분에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가장 먼저 친구들부터 찾아갔다.
경제적으로 나락에 빠져있을 때, 난 친구들 모임의 총무였다. 회비로 모아둔 수백만 원 그리고 친구들 개개인한테 몇 백만 원씩 빌렸었다. 그런데 빚더미에 올라앉은 후에 비겁하게도 잠수를 탔었다.
금방 해결해야지 했는데, 무려 10년 동안이나 친구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경제적인 수입이 생기면서 10년 만에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순식간에 다 모여줬다.
그리곤 어제 만난 것처럼 얘기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며 술을 마셨다. 먼저 '돈 얘기' 꺼내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돈을 갚겠노라고 얘길 꺼냈더니, 친구들은 하나같이 10년 지났으니 공소시효 만료(?)됐다고 입을 모았다. 고마웠다. 그날 난 정말 많이 울었다.
다음날부터 친구들을 개별적으로 찾아가 빚을 갚았다.
이자는 못 준다고 원금만 그 자리에서 현찰로 건네줬다. 어떤 친구는 와이프 몰래 준 돈인데, 괜히 수중에 돈 있는 거 들켰다간 오히려 궁지에 몰린다고 갚지 말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처음부터 받을 생각 없이 그냥 준 돈이라면서 손을 저었다. 어떤 친구는 돈 준 기억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눈물이 계속 나왔다. 마음 터놓을 친한 친구가 예전과 다름없이 나를 대해준 고마움이 더 컸다. 그 이후, 1년 안에 다른 빚도 청산을 할 수 있었다. 여자 친구와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만약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날 믿어주질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이 되었다. 나도 그녀의 성장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동종업계 선배로 그녀의 일을 도왔고, 그녀는 어느새 대형 유명 신문사에 자신의 이름을 건 칼럼을 기고할 만큼 성장해 나갔다.
빚도 갚고 안정적인 소득이 생기면서, 우리는 컵라면 대신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고, 여행다운 여행도 다닐 수 있게 됐다.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성공의 기준이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그저 남들처럼 해외여행도 같이 가고 싶고, 더 좋은 음식도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업권을 들고 들어간 그 회사에서는 날 오래 기다려 주질 않았다. 당시 경영자는 빨리 성과를 내놓으라며 재촉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야속했다.
지금은 이해한다.
경영자의 위치에서 매출에 신경이 곤두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당시에 겪었던 스트레스와 압박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월급은 괜히 많이 주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매일 야근을 하고 거의 모든 주말에도 일거리를 싸들고 집에 갔다.
사실 2년가량 내가 펼친 일들은 실패뿐이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많은 월급을 받고 있었지만, 회사에 기여한 일이 없으니 출근해 앉아 있기가 가시방석이었다.
급기야 연봉까지 깎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했다. 알아서 내 발로 나가야 하는 분위기가 되었지만, 난 애써 모른척하고 버텼다. 받고 있는 월급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더 그랬다. 나이가 많아져서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갈 자신도 없는 상태였다.
2년째 버티고 있던 어느 날, 몸에서 이상 신호가 왔다.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과음에 흡연까지……. 이러다 죽겠다 싶어 운동을 시작했다.
틈나는 대로 걷거나 달렸다. 처음에는 운동을 해서 살이 빠지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업무 때문에 술자리로 향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속이 뒤틀리고 쓰려고 도저히 자리를 지킬 수 없어서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났다.
집에 돌아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녘에 깼다.
이상하다 싶었다.
시동을 걸었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들어서자 쓰러졌고, 눈을 떴을 때는 다음날이었다.
내 몸에는 여러 개의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보호자가 있어야 검사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차마 부르지 못했다. 친동생을 불렀다. 검사 결과는 스트레스로 인한 천공.
뚜둥~;
위궤양이 심해진 것이다.
피를 토하고 혈변을 보는 처참한 상태였다.
검사를 마치고 입원한 상태에서 여자 친구에게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날부터 그녀는 내 곁을 지켰다.
“몸이 망가져 가는 게 느껴지지만… 이제 겨우 살 만해 졌는데, 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많은 월급을 포기 못하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돈보다 건강이 먼저지.”
“돈은 나중에 벌어도 돼.”
“우선 사표부터 쓰고 그다음은 나중에 생각해요.”
끊임없는 내 건강을 위한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렇게 많은 잔소리는 연애 이후 처음 들었다.
그 당시 난 돈이 절실했지만, 몸은 더 이상 버텨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 건강부터 걱정해 주는 그녀가 고마웠고, 다음을 고민해 보자는 그녀의 말이 위로가 됐다.
난 2주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퇴원 후 회사에 사표를 냈다.
‘죽을힘을 다해’ 회사에 들어갔지만 ‘죽기 일보직전’이 돼서 뛰쳐나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한편으론 결혼에 대한 확신도 생겼다. 이 여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 하겠다고….
퇴직금을 받았다. 그 돈으로 그녀와 여행을 갔다.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인생 한 번뿐인 프러포즈를 위해서였다.
결혼 전 농담 삼아 나눴던 얘기 중 프러포즈가 선택이냐, 필수냐 논란도 있지만, 그녀는 프러포즈를 원했었다. 나도 멋진 프러포즈를 선물해 주고 싶었 다.
어떻게 해야 받아줄까.
어떻게 해야 감동을 줄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프러포즈를 그려봤다.
관객이 가득 찬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프러포즈를 할까?
문화부 기자다운 프러포즈라 생각해 넌지시 물어봤더니,
‘난 그런 프러포즈 정말 싫더라. 나라면 무조건 'No'라고 외칠거야.’
그래서 곧바로 포기했다.
남산타워 꼭대기에서 해볼까도 고민해 봤었다.
그 당시 내 나이에 하기엔 너무 비루하다 싶어 포기했다.
고민 끝에 난 파리 여행에서의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그녀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다행히 여행기간 중에 그녀의 생일도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맞이한 그녀의 생일 아침, 생일 축하한다며 아침에 눈뜨자마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자세히 봐야 보이는,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목걸이였다. 누군가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하긴 난생처음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우린 파리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날 난 정장차림이었다.
‘오늘은 너의 생일이니까 격식을 갖추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그날의 최종 목적지는 에펠탑이었다.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그녀가 센 강을 바라보며 파리의 야경에 흠뻑 빠져드는가 싶더니 이내 바람이 너무 불어 춥다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아~ 이게 아닌데….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었다.
추위에 떨던 그녀는 갑자기 얼음이 돼 그대로 서있었다.
나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이어나갔다.
그댈 꿈꿔왔소~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댈 알고 있었소
기도로 노래로 볼 순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하나였소
둘시네아 둘시네아~
하늘에서 내린 여인 둘시네아
천사의 속삭임 같은 그대 이름
둘시네아 둘시네아~
그대의 머릿결 손을 뻗어서 탐함을 용서하여 주소서
이것이 꿈인지 정녕 현실인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니
둘시네아 둘시네아~
그댈 위해 살아왔네 둘시네아
그댈 만남은 기다림 끝에 영광
둘시네아 둘시네아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주인공인 돈키호테가 꿈꿔오던 연인 '둘시네아'를 위해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다. 물론 둘시네아 대신 그녀의 이름으로 바꿔 불러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노래 부르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그녀는 또다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도 호강 못 시켜 줄 수도 있어. 나랑 결혼해 줄래?”
“응! 좋아요.”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는 반지를 받아줬다.
그녀는 이날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고 한다. 아침에 목걸이 선물을 받아서 더 그랬다고.
자랑질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곁들자면 나중에 우리의 결혼식에서 뮤지컬 배우 정성화 씨가 이 노래를 포함해서 두 세 곡이나 묶어서 축가로 불러주었다. 결혼식 그날 온 하객들은 주인공 사진 찍다 말고 축가 무대를 향해 휴대폰 방향을 바꾸긴 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고마웠다.
어쨌든 벅찬 마음을 오래 느끼고 싶었던 우리는 에펠탑에서 호텔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두 손을 꼭 잡으며 1년 안에 결혼식을 올리자 약속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프러포즈하면 'No'라고 한다더니 아까 울다가도 반지 받더라.”
“아까 무릎을 제대로 안 꿇더라. 그럼 무효인 거 알지?”
“나 같은 남자가 흔한 줄 알아?”
“입으로 절반 깎아 먹네요.”
근사하고 로맨틱한 프러포즈로 그녀에게 확신을, 행복한 결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싶었다. 함께 잘해보자는 격려, 정말 잘해볼 수 있을, 그런 확신.
우리에겐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힘든 고비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마냥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