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결혼해요

완벽에 가까운 삶_1...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훈훈하니 2023. 1. 27. 20:00

 

완벽에 가까운 삶   

 

 

밤 12시.

우리 바다 보러 갈래?

“내일 출근하는데, 피곤하지 않겠어?”

하루 정도 피곤해도 괜찮아. 오랜만에 일출 보고 오자.”

그리곤 우린 바다로 향한다. 해가 떠오르는 걸 보 면 좋지만, 못 봐도 그만이다. 날이 흐려도,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함께 바라보는 바다는 언제든 아름다 울 테니까. 더 이상 통금시간이 다가오는 걸 아쉬워할 필요도 짧은 만남과 긴 헤어짐을 슬퍼할 필요도 없는 우리 사이. 이제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나의 일상들. 이보다 더 완벽한 삶이 있을까?

 

몇 해 전, <응답하라>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평 소 드라마를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응답하라 시 리즈 중에서도 응팔, <응답하라1988>은 관심 깊게 봤었다. 1988년은 내가 고3 수험생이었고 건국 이래 최고의 행사인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대학 신입생이 된 1989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역사적인 해였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이선희, 유재하, 김광석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풋풋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한때’는 아니다.

 
응답하라 1988
 
시간
금, 토 오후 7:50 (2015-11-06~)
출연
성동일, 이일화, 류혜영, 혜리, 최성원, 김성균, 라미란, 안재홍, 류준열, 김선영, 고경표, 김설, 최무성, 박보검, 유재명, 이동휘, 이민지, 이세영
채널
tvN

콩나물시루 같이 빡빡한 교실에서 오직 좋은 대학 가려고 달달 외우는 공부만 했던 학창시절. 당시엔 입시경쟁이 치열했고, 대학에 못가면 인생 낙오자로 찍히는 때였다. 난 다행히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에 대학가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 아다니는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선배따라 시위 현장에도 가봤지만, 일찌감치 내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난 대의명분을 위해 나 자신을 헌신하는 그런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공부보다는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술은 잘 못 마셔도 술자리엔 늘 붙어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구 놈들은 피가 끓어 날뛰던 그때에도 난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친구 따라 소개팅엔 나갔지만 시큰둥하게 앉아 있기 일쑤였다. 그저 친구와 함께 놀고 싶은 마음에 나간 소개팅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여자에게 무관심할수록 날 좋다고 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좋다는 여자들이 많으면 무슨 훈장쯤으로 여기며 우쭐해하긴 했지만, 정말로 내 마음을 움직이는 여자는 없었다. 정말로 놀러 다니는 것 말고는 별다른 관심사가 없었다.

당시의 나는 내 또래들이 대부분 그렇듯, 입시지옥을 뚫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았었다. 그러다 막상 대학에 가서는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하는지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었던 것 같다. 이렇게 목적없이 놀기만 하다간 죽도 밥도 안되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학생활을 다시 출발하고자 반수(재수)에 도전하려 입시학원도 다녀봤고, 다른 전공을 기웃대다가 낙제 수준의 학점을 받으며 방황했다. ‘군대에 다녀오면 어른이 된다.’는 말을 위안 삼아 택한 것이 미루고 미뤘던 현역 입영이었다. 30개월의 군대 얘기는 할말하않이므로 생략한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오니, 정말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동생이 대학에 입학하고,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에 내 앞가림은 내가 헤쳐 나가야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그 때는 그런 상황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나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했지만 나의 시선은 알바로 경험했던 광고업계를 향하고 있었다.

 

우연히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는 외삼촌과 만나서 매킨토시로 광고시안을 디자인하는 모습에 반해버렸다. 매킨토시라는 낯설고, 값비싼 첨단문명의 산물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이 한없이 멋져보였다. 그래서 단기간에 많은 프로그램과 매킨토시를 마스터했고, 학원과 대학 및 기업에 특강을 나가기도 했다. 특강 요청은 끊이지 않았다.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꿈을 위한 투자는 시각디자인과 편입으로 이어졌다. 학업과 직장생활은 나의 삶에 톱니바퀴처럼 쉼없이 돌아갔다. 언제 써먹을지도 모르는 디자인 기사자격증도 취득했다. 참고로 이 자격증은 20년이 지나서 써먹게 되었지만 ㅎㅎ.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큼은 설레고, 열정 가득한 시절이었다.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운 좋게 대형 광고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이후 광고회사에도 사표를 내고 방송국으로 이직하기도 했다.

 

X세대로 불리는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버림받은 세대’ 혹은 ‘저주받은 세대’라고도 불린다. 하필이면 IMF 관리체제로 접어들어 취업문이 굳게 닫혀 있던 때에 대학문을 나서야 했으며, 그래서 취업 원서도 변변히 못 써봤고, 경기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취업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이제는 나이 제한에 걸려 취업 원서조차 못 내는 상황을 마주했다.

 

그나마 나는 살길을 찾아 헤맨 덕분에 거품경기의 끝물 전 취업을 할 수 있었다. IMF 한파의 직격탄을 피해, 취업문을 통과한 나는 정말 ‘운 좋은 놈’이라 생각했었다.

 

지금이야 인턴제도가 있어서 재학 중 혹은 취업 전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취업 후 고민하다가 이직하고, 또 고민하다가 방황하는 시행착오로 나이를 먹어가던 시절이었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에미넴이 주연한 영화 <8마일>에 나오는 대사다. 원래 대사는 이렇다.

“Like when you gotta stop living up here and start living down here?”

꿈속에서 그만 살고 언제 현실로 돌아와야 하냐고?

 
8 마일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디트로이트 8마일 313구역 힙합 클럽의 랩배틀, 단 45초! 그 안에 상대를 쓰러트려야 최고가 된다. 그의 희망은 분노에서 시작된다.
평점
8.4 (2003.02.21 개봉)
감독
커티스 핸슨
출연
에미넴, 킴 베이싱어, 브리트니 머피, 메키 파이퍼, 안소니 마키, 에반 존스, 오마르 벤슨 밀러, 데안젤로 윌슨, 유진 비어드, 타린 매닝, 래리 허드슨, 프루프, 마이크 벨, DJ 헤드, 마이클 섀넌, 클로에 그린필드, 메리 해니건, 스트라이크, 내숀 옥스 브리드러브, 폴 베이츠, 엑스지빗

이 대사가 국내 개봉시 주인공의 상황에 맞춰 의역되었다고 한다. 높은 이상에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을 빗대어 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SNS 상에서 유행했었던 전설의 짤방으로 한마디로 ‘현시창(현실은 시궁창이다.)’이라 부른다. 내가 그토 록 원해서 들어갔던 직장이 어땠냐고 물으면, 딱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완성된 광고만 보고 광고인이 화려하다 생각한다. 일반 회사원보다 옷차림의 제약이 없어 자유롭게 꾸밀 수 있고, 연예인들과 함께 일하는 아주 화려한 직업.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멋진 카피라이터 아이디어와 광고시안을 제안하는 열띤 회의? 그런 것은 없었다. 회의에 감히 낄 수도 없고, 기껏해야 자료 복사하는 게 내 주요업무였다.

 

복사만 하던 시절을 지나, 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단계에 와서는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밤을 새워가며 불태웠던 나의 아이디어는 선배의 것이 됐고, 그 아이디어로 만든 광고가 광고제에서 수상하게 된 성과또한 선배의 공으로 돌아갔다. 노력만으론 뛰어 넘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s대 출신인가, 아닌가.’

‘사 주일가인가, 아닌가.’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따라 업무의 성과와 상관없이 직원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루저의 패배의식일지는 모르겠다.

결국은 분에 못 이겨 회사를 뛰쳐나왔다. 조용히 나온 것도 아니고 요란(?)하게 그만뒀다. 그러니, 알음알음으로 평판조회가 가능한 좁은 업계에서 다시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 기대가 커서 실망도 컸을까. 나의 진로는 막막해졌고, 또다시 방황했다. 조금만 참을걸. 후회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만두기 전에 난, 여전히 IMF 한파의 여파로 취업시장이 얼어붙어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당시 여행사에 다니다 회사가 망해서 백수가 된 베프와 공무원 시험도 준비했다. 난 떨어졌다. 그 친구는 신혼이었지만 또 그만큼의 책임감 때문에 독하게 공부했던지라 합격의 영예를 거머쥐었고, 꾸준한 노력으로 승진을 거듭해 지금은 꽤 높은 자리에 있는 현직 공무원이다.

 

백수가 된 나의 20대 끝물에 찾아온 첫사랑도 실패하고, 준비없이 시작한 사업까지 실패로 끝나면서, 난 최악의 상황과 마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죽을 생각만 했었던 것 같다. 당시 빌라 5층에 살고 있었는데, 뛰어내릴까 생각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난 겁이 많았다. 너무 아플까봐 뛰어내릴 용기가 없었다.

 

또다시 시간만 허비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더 이상 돈이 없어, 먹고살 수 없는 현실 앞에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50~60대 어르신들 틈바구니에서 30대 초반의 막내 나이로 운전대를 잡았다. 기간없는 계약직이었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택시기사 생활. 열심히하면 하루 30만 원도 벌 수 있었다. 일당을 벌어 그 돈으로 술마시는 생활이 이어졌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으니, 악착같이 돈을 모을 이유도 없었고, 술 사먹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 인심(?)도 후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어르신이 탑승하면 택시비를 안 받았고, 등굣길에 지각 면하려고 택시를 탄 학생 들도 반값만 받고 태워줬다.

 

내 후한 인심은 인근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어느 날 등교시간에 학생 3명이 한꺼번에 내 택시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저씨 이거 반값 택시 맞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친구가 ㅇㅇㅇㅇ번호 택시 타면 반값만 내도 된다고 알려줘서 번호 외우고 기다렸어요.”

“어……어……그래.”

 

시간이 지나면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걱정되기 시작했다. 누가 날 알아볼까봐, 일 나갈 때는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썼다. 차안에 비치돼 있는 택시면허증을 나와 교대하는 아저씨의 택시면허증으로 바꿔서 놓아두기까지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내 면허증을 걸어두고 일하고 계셨더라. 그 분도 나처럼 ‘택시운전’하고 있다는 걸 감추고 싶은 사정이 있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기사님과 커피 한 잔 할 기회가 생겼다. 그 기사님은 백발의 어르신이었다.

 

“택시운전은 정말 할 일 없을 때나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인생막장에 왔을 때나 하는 일이야. 나는 할줄 아는 게 운전밖에 없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젊은 사람이 대학까지 나왔다면서 왜 이러고 있어?

 

인생막장이라는 단어가 심장에 박혔다. 충격이었다. 요즘에는 인식도 많이 달라졌지만, 20년 전만 해도 택시운전사, 특히 회사택시를 운전하는 기사들은 갈 곳 없어 온 사람들이 많았었다. 새벽마다 취객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시비 끝에 경찰서에 들락거려야 하는 생활에 나도 지쳐가고 있던 참이었다.

 

며칠 후, 새벽 4시에 어머니의 호출을 받았다. 집이 아닌 이모님 댁으로. 호랑이 같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었던 아버지. 특히나 내가 폐인으로 살던 당시에는 더욱 말이 없으셨다. 그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만 바라보실 뿐. 이모님 댁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다짜고짜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미셨다.

 

“너 일하는데 불러냈으니까, 일당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둬라.”

“…….”

“언제까지 그러고 살거니? 엄마는 지금 너의 모습이 창피해서가 아니다. 뭔가 열심히 하는게 아니라 시간만 죽이고 있어서 지켜보기가 힘들다. 자식이 망가져 있는 꼴을 보는게 엄마는 정말 힘들어. 제발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줘, 엄마 소원이야.”

자식을 낳아보니 지금은 알겠다. 자식이 힘들면, 부모는 자식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아프다는 걸. 하지만 그때는 잘 몰랐다. 나이를 서른이나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철부지였다. 그날 난 수표를 만지작거리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고, 운전대를 더 이상 잡기 힘들었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내비치니 미안한 생각이 가득했고, 더 큰 이유는 버티기가 너무 힘 들었다. 취객에게 더 이상 시달리기 싫었다. 그날 이후,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냈다.

 

To be continued...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