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에 가까운 삶_2... "나를 채워주는 그녀가, 아내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있기에"
그날 이후,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냈다. 그중 합격한 곳이 신문사였다. 그렇게 30대에 또다시 직장이란 울타리로 들어갔다. 대여섯 살 어린 동기들 속에서,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동기들이 힘들다고 그만둘 때도 기사는 물론 사진 찍고 일러스트도 하고, 컴퓨터와 복사기 고치는 허드렛일(?)까지 하면서 버텼다.
해봤던 일이라 익숙한 것도 있었다. 심지어는 영업까지 신문사에서 하는 모든 일을 경험해 본 것 같다. 그러면서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이 생겼다.
이후 몇몇 신문사를 거치며 경제부와 문화부 기자로 경력을 쌓아갔다. 내가 꿈꿨던 광고장이는 아니었지만, 기자라는 일은 재미도 있었고, 적성에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문화부 기자생활을 하던 중 나는 새로운 꿈도 찾았다.
‘내 이름을 걸고 신문사를 차려보자!’ 내가 좋아하면서도 오롯이 내 노력의 대가로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인터넷 매체가 드물었던 시절, 나는 공연예술 전문 인터넷 신문사를 창업했다.
꿈을 위해 인터넷 신문사로 이직해서 1년 정도 활동했다. 당시는 인터넷 매체가 드물고, 특히나 공연문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매체는 거의 없었다.
창업을 서둘렀다. 더 큰 시련은 이때부터였다. 마냥 장밋빛일 것만 같았던 언론사업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과도한 빚이 쌓여 금융권 거래가 막히자, 가족 친구들에게까지 돈을 끌어다가 회사 운영비로 썼지만, 결국엔 신용불량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보니,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했다. 되는 일은 없고, 빚은 늘어만 가고. 그러다 보니,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도 점점 더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성공이라는 ‘인생의 매뉴얼’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 연애와 결혼은 사치였다. 너 같이 준비 안 된 남자랑은 결혼 못 한다고 떠나 버릴까봐 먼저 이별을 고하는 그런 나쁜 남자였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못 먹는 포도를 보며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저 포도는 아직 익지 않아서 맛이 없을 거라고 중얼거렸던 이솝우화 <여우와 포도> 속 여우처럼 맛없는 걸 굳이 먹으려고 애쓸 필요 없고, 안 먹으면 그만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난 점점 더 못난 놈이 되어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비범한 사람들처럼 세계 평화나 인류에 기여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돈과 지위가 곧 성공이라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성공 매뉴얼’을 쫓으며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났다. 말단 공무원 아버지와 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3형제 중 장남이었다. 낡은 한옥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성장기였지만 동네 친구들에 비하면 우리 집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어머니가 소시지나 돈가스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셨고, 주산이나 태권도 학원정도는 다닐 수 있었다. (동생들은 장남인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김치만 먹던 가난한 시절로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학창 시절 성적은 나름 상위권이었고 한 번에 대학에 합격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했기에 가난을 느끼지 못했던 동네에서 벗어나, 고급 브랜드 옷을 날마다 바꿔 입고, 승용차를 몰고 학교에 오고, 엄마 말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밥상을 차려주는 2층 집에 사는 친구들을 보며, 난생처음으로 가난이라는 걸 생각하게 됐다. 진짜 가난보다 무섭다는 상대적 빈곤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다.
이때부터 나에게도 성공이라는 ‘인생 매뉴얼’이라는 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 매뉴얼은 ‘저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돈과 지위가 곧 성공이라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매뉴얼과 다르지 않았다.
어디 가서 얘기해도 밀리지 않을 번듯한 직장과 자동차, 연애와 결혼 포함해서 내 나이에 걸맞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강했다. 그러다 보니 연속된 실패의 경험들은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진 나를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꼬일 대로 꼬여 앞이 보이지 않던 그때, 지금의 아내가 내 인생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누구나 결혼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겠지만, 내 인생은 결혼 전과 후로 나뉠 만큼 많이 바뀌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은 아내가 된 그녀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여전히 직원들의 월급날이 가장 두려운 대한민국의 보통 사장이고, 주머니 사정은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정도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달라졌다.
지나고 보면 목숨 걸고 아등바등 살 만큼 삶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산다는 게 그리 특별한 일의 연속이 아니라는 깨달음. 날 행복하게 만드는 건 큰 성취보다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라 것도 아내를 만난 후, 알게 된 것이다.
젊은 날의 나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 잘난 맛에 사는, 내가 제일 먼저인 나쁜 남자였다. 그래서 날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누군가가 나에게 피해를 준다 싶으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매우 공격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
금의 나도 여전히 진중하고 속이 꽉 찬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치밀한 계획보다는 운을 믿고, 노력한 것보다 요행을 바라고, 진지한 것보다는 재미를 쫓고, 입만 열면 썰렁한 농담에 아재 개그를 남발하는 그런 캐릭터! 누가 칭찬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기보단 셀프칭찬을 열심히 실천하는(feat. 아내) 깃털 같은 가벼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제는 포용력이 생겼다고 할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됐다. 이런 나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아내와의 만남이었다. 7년의 연애와 7년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는 나를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원동력이 돼 주었다.
함께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영화를 함께 보고, 가끔은 새벽에 훌쩍 바다 보러 떠나기도 하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 하지만 통금시간 걱정 없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함께할 수 있는 지금. 7년의 기다림 끝에 결혼을 하고, 딸아이를 출산하고 모든 순간순간이 행복했고, 행복하다. 이 행복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실제로 너무 행복해서 불안했다. 그 무렵, 든든한 그림자 같았던 아버지가 우리 집안의 유일한 손녀의 첫 돌도 못 보시고 소천하셨다. 그나마 손녀의 탄생과 백일잔치는 지켜보셨으니 아버지는 행복하셨을 터. 하지만 행복하게 잘 나가던 나의 인생에 겸손과 책임감이라는 숙제를 남겨 주셨다.
세상엔 완벽한 행복은 없다고 한다. 다만 미소 지어지는 작은 순간들이 채워져, 행복한 하루를 만들고,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것일 뿐. 완벽한 삶이란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완벽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난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를 채워주는 그녀가, 아내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