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그녀의 눈치 보는 중이었다. 싫은 기색을 비추면 재빨리 발을 빼려고 늘 한쪽 발만 그녀 쪽으로 걸쳐 놓은 상태였다고 할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녀는 내 썰렁한 개그에도 빵빵 터졌고, 많이 웃어줬다. 공연과 영화를 보고 나서의 ‘후 토크’도 우린 서로 잘 통했다.

하루는 공연을 보고 그 다음날은 영화를 보고, 주말에는 주중에 못 본 영화와 공연을 보는 만남이 이어졌다. 그중에는 당시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던 뮤지컬 <김종욱 찾기>도 있었다. 공전의 흥행을 기록하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작품이다.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인도로 여행을 떠난 스물둘의 여주인공. 턱 선의 각도가 외로워 보이며, 콧날에 날카로운 지성이 흐르는 운명의 남자, ‘김종욱’을 만난다. 비행기 안에서 시작된 운명적인 세 번의 인연으로 둘은 사랑에 빠지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 후 7년 동안, 여주인공은 시간이 지나도, 어떤 남자를 만나도, 여전히 첫사랑 김종욱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운명적인 첫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주인공은 ‘첫사랑 찾기 주식회사’를 찾아가고, 거기서 ‘첫사랑을 찾아주는 남자’를 만나, 지금은 서른 초반이 되었을 추억 속의 김종욱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운명이라 믿었던 첫사랑을 다시 만났냐고? 결론은 아직도 영화나 뮤지컬은 안 본 분들을 위해 아껴두겠다.
<김종욱 찾기>의 여주인공이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를 운명이라 생각한 이유는 반복된 우연을 필연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이 반복된 필연이 가져온 선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인 김종욱은 필연보다는 반복되는 우연이 가져온 결과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김종욱의 진심이 뭐였는지, 뮤지컬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만큼 두 사람이 느끼는 사랑의 무게 또한 달랐을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서른아홉의 나는 로맨티시스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동안 날 방황하게 했던 첫사랑 이후 몇 차례의 만남과 이별이 있었지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상대는 없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밀려날까봐 미리 상대방을 밀어내기에 바빴었으니까.
그날 영화를 본 후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운명의 상대’라는 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내가 그녀에게 정말로 궁금했던 건 ‘이제 겨우 스물하나인데, 사랑이라 부를 만한 연애를 해봤으려나?’였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내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운명의 상대 같은 건 믿지 않아요. 한때의 격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죠.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서로에게 신뢰를 쌓아가는 거라 생각해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난 한 번 더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마냥 어리기만 한 스물한 살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알면 알수록 어른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그녀는 초등학교 때 천안에서 서울 강남으로 전학을 오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고 한다. 그녀는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혼자서 책 읽는 시간도 좋아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더 성숙했던 그녀의 친오빠와 어른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았으며,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과 소통을 더 많이 해서 그런지 이미 정신적인 성숙도는 어린 시절부터 갖춰졌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학보사 기자가 되었다. 기자라는 꿈도 있었고, 학보사에 들어가면 특별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다양한 직업, 연령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쌓은 간접적인 삶의 경험들과 지식들은 그녀를 나이보다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다. 또래 남자들은 마냥 어리게만 보여 이성으로 끌리지 않았다고 하니, 나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녀는 틈틈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 정도는 스스로 해결했다고 한다. 교직에 계신 아버지 덕분에 학비 걱정할 형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전공, 부전공, 복수전공까지 하고 한 학기 조기졸업까지 했으니, 분명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근차근 자기 앞날을 위해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는 독한(?) 구석이 있는 여자. 추진력은 좋지만, 치밀함은 떨어지는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9살 어른스럽고, 난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사는 9살 어린 철부지. 그렇게 우리는 정신연령만큼은 동갑내기라고, 이런 자기합리화(?)에 이르게 됐다.
나의 ‘정신연령 동갑내기’ 자기 합리화에 힘을 보태준 건, 그녀의 태도였다. 평소 눈치 없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 편인 내가 느끼기에 그녀도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 공연이나 영화 보러 가자고 하거나 밥이나 먹자는 제안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날마다 만나고 날마다 집에 데려다주는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다.
짧은 기간의 탐색전(?) 끝에,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내가 대표라서 거절 못 하고 계속 만나주는 거야?”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면접날 대표님 처음 봤을 때, 그땐 대표님인지 누군지 몰랐지만, 정말 '슈트발'이 잘 받는다고 생각했는데요. 멋있어 보여서 자꾸 눈길이 갔어요. 그때부터 호감이 있었어요. 물론 그땐 대표님 나이가 그렇게 많을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알면 알수록 대단한 여자였다. 난생처음 면접을 보는 그 혼돈의 와중에도 슈트발이 멋진 남자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니. 그게 바로 나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던지. 게다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녀도 나에게 첫눈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호감을 확인한 그날 이후, 우리는 여느 연인처럼은 아니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데이트를 했다. 멋진 곳에 데려가고, 비싼 선물 공세를 했냐고?

아니다. 한강공원에서 컵라면을 먹고, 후식으로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돈 드는 공간에 가는 대신 걷고 또 걸었다. 그런 소박한 데이트를 그녀 또한 즐기는 듯했다.
사실 그녀에게는 ‘오랜만에 자판기 커피와 컵라면을 먹는 소박한 데이트를 해보고 싶었다.’ ‘이런 게 원래 내 취향이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핑계였다. 당시의 나는 정말로 돈이 없었다.
회사 대표인데 돈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그녀를 만난 서른아홉의 나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장 이번 달 갚아야 할 원금에 이자까지…….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려 있었다. 아홉수(?)라 부르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인생의 혹한기였다.
게다가 난 좋은 남자 친구가 될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나쁜 남자 쪽에 가까웠다. 순수했던 사랑도 있었지만, 몇 번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겪은 후, 여자가 먼저 떠날 것을 대비해 늘 ‘아님 말고’의 마음으로 여자를 만났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머릿속에 계획표가 생기는 여자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만큼 만나면 고백을 받고 싶고, 얼마가 지나면 이런 프러포즈를 받고 싶고……. 드라마나 영화 속 러브스토리처럼 일련의 과정들을 꿈꾸며 나에게 기대했지만, 난 그녀들의 마음을 몰랐고, 때로는 알면서도 외면했다. 그녀와의 만남이 계속될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이 싹텄다.
나보다 좋은 남자를 만날 기회가 얼마든지 많은 어린 친구에게 컵라면 밖에 못 사주는 나 같은 사람을 계속 만나자고 해도 되는 걸까? 서로를 향한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놔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평소처럼 그녀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곤,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말을 꺼냈다.

“앞으로도 컵라면 밖에 못 사줄지도 몰라. 넌 좋은 남자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데, 너의 앞길을 막고 싶지는 않거든. 더 만났다가 서로 상처 주지 말고, 아니다 싶으면 여기서 끝내도 돼.”
그녀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불안했다.
“나한테 3일만 시간을 줘요.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알았어, 기다릴게.”

애써 쿨한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곧바로 후회가 밀려들었다. 괜히 먼저 얘기를 꺼낸 거 아닐까? 이대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머릿속은 수많은 걱정들로 채워졌고, 이후 이틀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느린 시간이었다. 애꿎은 전화기만 노려보며, 먼
저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출근을 해서도 하루 종일 그녀의 눈치만 살피며 보냈다. 그리고 이틀 후 저녁,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짧은 문자메시지였다.

“왜 연락 한번을 안 해요?”
“3일 동안 시간 달래서ㅠ”
“안 궁금해요?”
“궁금했지만 시간 달래서ㅠ”
“그냥 사귀죠. 우리 내일 만나요.”
그 다음날 우린 만났다. 3일 만이었다.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밝았고, 차창으로 흘러드는 바람은 싱그러웠다. 그날의 나에겐 자동차의 매연마저도 향기롭게 느껴졌다. 가슴 벅찬 마음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본 기분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와 마주 앉았다.
“3일 동안 무슨 생각했어?”
“이 사람을 안 만나고 내가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안 될 것 같더라고요.”
“넌 아직 어리잖아, 좋은 사람 만날 기회도 많고.”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그녀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로 그녀는 나의 고백을 승낙했다. 스물하나, 서른아홉의 우리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고수부지 컵라면 데이트를 이어갔다.
“나는 결혼할 사람 아니면, 돈 안 쓴다.”

주로 이런 핑계를 댔었다. 당시 그녀는 정말로 그런 줄만 알았다고 한다. 옷이나 가방을 선물하면서 괜히 폼 잡으려고 돈 쓰는 남자들보다 낫다고 칭찬까지 해줬다.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덜덜거리는 수동 기어의 자동차를 타고도 우린 행복했었다. 단지 변속할 때마다 기어를 바꾸느라 운전하는 내내 손을 잡지 못해 안타까울 뿐. 사랑을 막 시작하는 연인들의 달달함과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던 그때…….

가난한 연인이었지만, 그래도 우린 햇살 속에 있었다.
- 저자
- 이훈희
- 출판
- 푸른쉼표
- 출판일
-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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