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은 동굴벽화에서 시작됐다. 그 당시엔 그게 영상이었으니까.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영상을 움직이는 것으로만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피사체의 정지된 이미지를 연속으로 보는 기술의 발달로 가능한 것뿐이다. 그래서 책 제목에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붙였다.
인쇄된 책은 장단점이 존재한다. 이 책 ⟪영상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영상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인쇄물에 담지 못해 아쉬운 부분을 영상을 첨가해 인쇄물에 대한 단점을 보완하고자 한다.
PROLOGUE
영상을 기획해서 촬영하고 편집해서 공유하는 작업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됐다. 유튜브에서 수십만 회 조 회 수를 기록하는 콘텐츠 대부분이 미디어 전문가가 아닌 일반 인의 손을 거친다. 즉 영상의 촬영과 편집과 공유에 있어서 과 거와 같은 장벽은 무너졌다. 매체의 장벽, 또는 기술적 장벽이 사라진 시대다. 300만 원짜리 카메라 하나면 TV나 영화 못지않은 질감의 영상물을 만들 수 있다.
편집 프로그램과 디지털카 메라, 촬영용 드론의 성능도 매우 좋다. 공중파나 영화의 미장센을 구현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이유다. 지금 시대 영상을 공부하는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장르로서의 영상이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미니드라마, 영 화, 숏폼, 광고와 같은 문학적 성격이 강한 영상의 문법과 제작을 배우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촬영과 제작, 편집과 효과 등 의 영상 기술적 부분이다. 마지막 하나는 영상예술 이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에 언급한 바로 이 영상예술 이론이다. 기술교육만을 하는 학원과 달리 학부 과정에선 어떤 영역이든 ‘영상’이라는 말이 들어간 학문을 배우면 개론의 성격으로 이 ‘예술이론’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이 학문을 처음 접한 학생들은 당혹스러워한다. 자신은 좋은 시나리오 제작자나 영화감독, 혹은 독특한 광고 제작자가 되기 위해 왔는데, 교수 혹은 학자들은 ‘기호학’과 ‘미학’을 들이민다. 언어학과 영상 기호학, 이미지와 시각 반응에 대한 연구, 디지털 아트 등등 대부분의 전공자에겐 하품이 쏟아질 정도로 지루한 고행의 과정이다.
책은 물론이고 개념도 무척이나 어렵다. 평론가나 미학을 할 요량이 아니라면 영상으로 먹고살겠다는 청년들에게 이런 학문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다.
이 책을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 더 흥미롭게 영상이론에 접근하게 할 순 없을까. 영상이론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워서 어디에 쓸 것인가?”
학위를 따거나 교수가 되고 싶다는 사회적 관문 말고 현실에서의 효용 말이다. 막막할 것이다. 왜냐면 사회적 수요가 거의 없으니까. 그렇다면 왜 사회적 수요가 없을까? 그 이유는 한국에 소개된 영상미학과 관련한 대부분의 내용이 번역학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의 철학자와 기호학자들의 언어는 상당히 주관적이며 자가명명한 개념들이 많아 학술적 개념으로서의 보편성을 발견하기 상당히 어렵다.
독창성을 중시하며 새로운 학술적 개념을 명명하길 좋아하는 그들의 글을 따라가려면 맥락은 물론 개인의 언어습관까지 요해(了解) 해야 한다. 이런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장벽은 한 번 더 관문을 형성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라면 영상 또는 영상미학이 철학적 개념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점도 없지 않다. 즉 철학자들이 영상을 다루는 이유는 철학적 사유를 발전시키기 위함이지 영상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에 연구성과가 뛰어난 이들은 많지만, 이를 대중의 언어로, 또는 자신의 언어로 다시 풀어쓸 수 있는 공력의 소유자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상으로 밥벌이하겠다는 사람에게 철학이나 미학, 기호학, 미술과 같은 학문은 더는 필요 없는 것일까? 단순히 편집실에 틀어박혀 새벽이 밝을 때까지 편집 노동만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면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다큐 멘터리나 영화, 유니크한 명품의 광고, 독보적인 드라마를 만 드는 예술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공부하고 끝없이 읽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면 사람의 마음을 훔쳐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왔다면 잠자리에 돌아와서도 계속 따라오는 장면과 궁금증으로 뒤척이게 만들고 비싼 제품의 광고라면, 그 광고 이미지 때문이라도 카드를 긁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학과 기호학, 영상 커뮤니케이션은 사람의 눈과 마음, 사유체계를 연 구하는 학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어려운 개념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쓴 책이다. 섬세한 관념과 이론 구조를 단순화시켰다는 비난을 할 수도 있지만, 이미지와 영상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 좀 더 구체적인 영감과 약도를 주려는 의도라는 것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학문이란 것이 그렇다. 대학시절 교수님이 내주는 커리큘럼을 의무적으로 소화하고 과제를 제출하면서 배우는 방법도 있지만, 우연히 전해 들은 이야기나 책, 전시회나 영화관에서 한참을 먹먹한 감정에 젖어 나오지 못하는 체험이 공부에 대한 큰 동기를 유발하기도 한다. 생각이 한 번 열리기 시작하면 밤잠을 아껴도 아깝지 않은 공부 말이다.
영상이라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자 예술이며, 문화의 총체이기 때문에 분화되고 파생된 관련 학문의 범위 또한 엄청나다. 그것을 모두 익힐 필요는 없다. 다만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생각의 질료를 구축할 방향은 탐색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책은 그렇게 썼다.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현실의 영상은 물론 가상공간 메타버스의 환경과 NFT가 유행하는 시대에도 개인적 영상은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자 예술이며 문화의 총체인 철학과 가치는 있어야 한다.
끝으로 책에는 담지 못했던 자료화면은 이해를 돕기 위한 영상과 사진을 담아 정리했다. 미학과 생동감이 넘치는 영상의 홍수 세상에 살아가고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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