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생로병사가 있듯 연애도 마찬가지다.
연애의 끝은 무엇일까.
실연이다.
실연(失戀)의 사전적 의미는 연애에 실패함을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삶의 끝이 죽음이라고 해서 죽음을 삶의 실패라고 말하지 않듯, 연애의 끝이 실연이라고 해서 실연을 연애의 실패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삶의 끝이 죽음이라는 걸 알고도 혹은 알기에 더 현재에 충실하고 즐기며 살아간다. 연애 또한 그러해야 한다.
이별이 두려워 방어로 점철된 관계를 맺는다면, 연애의 즐거움은커녕 이별을 앞당기고 후회나 미련을 늘려갈 뿐이다. 연애의 끝이 모조리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니까.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듯,
실연이 있어야,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수 있고,
그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진정한 내 짝을 발견하는 혜안을 얻게 된다.
마크 웹 감독의 <500일의 썸머>는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간 자신의 연애사를 떠올리게 해주는 영화다. 영화는 사랑 이야기처럼 보지만 시작할 때부터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며 못을 박고 시작한다.
- 평점
- 7.7 (2010.01.21 개봉)
- 감독
- 마크 웹
- 출연
- 조셉 고든 레빗, 조이 데샤넬, 패트리샤 벨처, 레이첼 보스톤, 이베트 니콜 브라운, 젠 고트존, 제프리 아렌드, 올리비아 하워드 백, 클로이 모레츠, 매튜 그레이 구블러, 클락 그레그, 민카 켈리, 이안 리드 케슬러, 대릴 알란 리드, 발렌트 로드리게즈, 니콜 비시어스, 나탈리 보렌, 마리 프레니건, 장 폴 비뇽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 영화 <500일의 썸머> 내레이션 中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운명적 사랑을 기다리는 순수 청년 톰은 어느 날 새로 입사한 회사동료 썸머를 처음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한다.
썸머는 구속받기 싫어하고 누군가의 여자이기를 거부하며 톰과는 친구도 애인도 아닌 애매한 관계를 이어간다. 썸머와 평생 함께하고 싶지만 어딘지 어긋나고 삐걱대는 두 사람은 썸머의 이별통보로 결국 헤어지게 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평범한 연애이야기로 보이는 영화는 남자 주인공 톰(조셉 고든 레빗)이 썸머라는 여자 주인공(주이 디샤넬)을 만나 좋아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내용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주인공, 특히 남자 주인공 톰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톰을 보며, 지난날의 나, 사랑에 서툴렀던 20~30대의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난 연애바보까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수차례(?) 실연을 겪었었다.
운명의 상대가 아니니까, 당연한 결과가 아니냐고?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영화의 한 장면 장면마다 지난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고, 이기적이었으며, 상대의 감정보다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날 더 사랑했던 과거의 나를.
영화 도입부에 보면 톰은 ‘운명의 여인’이라는 것을 깊게 믿는 남자로 묘사된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고, 기다리는 톰의 인생영화는 어릴 때 본 <졸업>이다.
- 평점
- 7.7 (1971.06.19 개봉)
- 감독
- 마이크 니콜스
- 출연
- 더스틴 호프만, 앤 밴크로프트, 캐서린 로스, 윌리엄 다니엘스, 머레이 해밀턴, 엘리자베스 윌슨, 벅 헨리, 브라이언 에이버리, 월터 브루크, 노먼 펠, 앨리스 고스틀리, 마리온 론, 에드라 게일, 리차드 드레이퍼스, 엘리자베스 프레이저, 도날드 F. 글루트, 해리 홀콤브, 조나단 홀, 벤 머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영화 <졸업(The Graduate)>은 옆집 아주머니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남주인공 벤자민이 결국 아주머니의 딸 엘레인과 사랑에 빠지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던 그녀와 함께 도망치는 내용이다.
영화 내내 엘레인은 벤자민에게 네가 왜 나와 꼭 함께하고 싶어 하는지 너도 모르는 것 같다는 식의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그에 비해 벤자민은
‘몰라. 네가 그냥 좋으니까.’ 식으로 반응한다.
이런 대책 없는 행동들의 결과물이 역대급 명장면인 버스를 잡아 탄 두 사람의 ‘앞으로 어떡하지?’ 느낌의 표정이 잘 설명해 준다.
톰은 영화 <졸업>의 내용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깊은 생각 없는 어리숙한 남자의 충동적인 행동에 대한 영화를, 톰은 역경을 헤치고 운명의 여자를 쟁취하는 남자로 해석한 것이다.
영화 내내 톰의 행동도 <졸업>의 벤자민의 행동과 굉장히 닮아 있다. 영화 초반부터 톰의 모습은 어리숙하게 그려진다. 신입사원인 썸머가 되게 차가운 여자라는 찌라시 수준의 동료 사원의 말을 듣고 그런 애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한마디로 귀가 얇은 타입이다. 중간중간 썸머와의 관계에 대해 의심하고 되돌아보는 것도 본인 의사보다는 친구부터 동생까지 주변인들의 의견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썸머와 안부 인사를 하다가도 주말 잘 보냈다는 그녀의 말투를 확대해석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톰은 줏대 없고 쪼잔하다.
썸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계기 자체도 ‘도끼병’스럽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썸머도 안다는 이유가 전부다. 여동생인 레이첼마저도 겨우 그것 때문에 둘이 천생연분이냐고 지적한다.
이후에도 썸머와의 공감대 형성보다는 그냥 데이트와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는 톰의 모습들은 여전하다. 영화 속에는 톰의 이러한 심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두 장면이 있다.
썸머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썸머는 톰과 침대에 누워 ‘이 얘기는 누구에게도 해준 적이 없어.’라면서 사적인 이야기들을 톰에게 털어놓는다. 이 순간 톰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이 이야기를 내가 들을 자격이 있을 정도구나!’이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거보다 자기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진다. 톰에겐 썸머 자리에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하나는 술집 장면.
톰과 썸머가 함께 술집에 갔는데, 한 남자가 썸머에게 일방적으로 지분거리기 시작한다. 결국 톰은 그 남자와 주먹다짐을 하게 되지만, 썸머는 톰에게 실망만 한다. 위기의 순간에 톰의 이기적인 태도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톰이 주먹질을 하게 만든 남자의 말은 ‘얘가 너 남자 친구라니 믿기지가 않네.’였다. 그전에 남자가 썸머를 귀찮게 할 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째려만 보다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 주는 말을 하자 주먹이 나간 거다.
한바탕 소동이 수습되고 난 후에도 톰은 썸머에게 내가 널 위해 싸움까지 벌였다는 말만 강조한다. 썸머가 아닌 자기 자신 때문에 싸운 게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데도 벅벅 우기는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 두 장면만 봐도, 이 연애의 끝이 안 좋을 거라는 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는 어장 관리하는 썸머를 욕하는 남자들이 종종 보인다. 썸머를 ‘어장관리녀’라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만약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톰을 차버린 썸머가 나쁜 X이라고 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 남자는 연애바보일 확률이 높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이별 후에도 톰의 지질함은 계속된다. 톰의 입장에선 그저 모든 게 다 잘되고 있었다는 생각뿐이었다. 톰은 썸머의 이별선고가 갑작스럽기만 하다.
톰의 생각과는 다르게 둘의 결별은 이전부터 이미 수많은 신호들이 있었다. 썸머는 같은 데이트를 하면서 즐거워하지 못하고, 톰이 잘못 해석한 영화 <졸업>을 감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영화 <졸업>의 결말이 사실은 새드엔딩이라는 걸 그녀는 알았고, 자신과 톰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톰은 사랑할 준비가 안 돼 있는 남자였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신이 좋았을 뿐, 상대방의 관심사나 취향, 생각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톰은 상대방보다 사랑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했었던 것 같다.
이런 연애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준비가 되었을 때, 진짜 사랑이 찾아오는 것이니까.
상대의 실체가 아닌, 자신이 투사한 이미지를 보고 시작하는 첫사랑 그리고 풋사랑은 때에 따라 과정은 다르더라도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곤 한다. 하지만 실패한다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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