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이런 책을 저자로 출간했다. 초보 작가들이 꼭 알면 좋은 내용의 책. 다시 읽어봤더니 제법 셀프칭찬할만하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직접 겪어보고, 다른 책도 섭렵해 가면서 읽을 만한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비하인드스토리는 누구나 있다. 나도 나중에 이 책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는 남겨둘까 생각 중이다. 그래서 이 책 ⟪책이 밥 먹여준다면⟫에 대한 내용을 미리 공개 좀 해놓으려고 인터넷에 '오픈'하게 되었다. _ ⟪책이 밥 먹여준다면⟫ PRLOGUE 중에서.
우선 시대가 인정했던 명저는 제쳐두고 말하자.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미국의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엔트로피》와 같은 책이 나쁜 책일 리는 없지 않은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아닌 책을 놓고 이야기하자.
① 좋은 책
‘좋은 책’이라는 의미는 주관적일 수 있다. 저자가 생존했을 땐 출판사에서도 고개를 저었던 책이었지만, 죽은 후에 진가를 인정받은 비운의 명작이 있고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소수의 계층에게 뜨겁게 사랑을 받아 가늘고 기다란 국수처럼 개정에 개정을 거듭해 살아남는 책도 있다.
부동산 투자로 수십억을 벌었다는 제목 하나로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책도 있으니, 사람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책이라고 나쁜 책은 아닐 것이다.
많이 팔리지도 않고 생명력도 짧지만 어떤 이에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와 같은 깨달음을 주는 시詩도 좋은 책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자신의 쓰임, 그 소명을 다한 책이다.
(“Le vent se lve! Il faut tenter de vivre!”.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의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문구다. 우리나라에선 남진우 시인으로 인해 다른 의미로 쓰이곤 한다.)
책이 살아야 출판사는 다음 책을 낼 수 있고 작가는 인세를 받아 다른 책을 쓴다. 이것은 출판시장의 법칙이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많이 팔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특정 독자에게 말을 걸거나 영감을 선사하는 데 그 목적을 두기도 한다. 그 목적을 충족했다면 좋은 책이다.
원로 문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과 관념의 찌꺼기를 모아놓은 것만 같은 90년대 생들의 가벼운 에세이가 10만 부 이상 팔려나가는 세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책들이 누군가에겐 치유의 언어로 심장에 남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몇 년 전 지인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다. 상주는 부고를 전하며 조문객에게 화환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나는 빈소 복도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화환 대신 놓인 건 고인의 청년 시절부터의 사진들이었다. 빈소에 놓인 TV에선 부친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과 함께 생전 가장 즐겨 불렀다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흘러나왔다.
세상에 호상(好喪)은 없다지만, 빈소에선 곡소리 대신 가족의 웃음소리가 흐르고 있었고 장례식장은 따뜻했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조문함 옆에 놓인 고인의 자서전이었다. 80쪽 정도 되는 책에 고인의 삶이 과장 없이 정갈하게 담겨있었다. 장례식장의 몇몇은 식어가는 육개장을 앞에 두고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집 막내는 아버지의 팔순을 앞두고 주말마다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글로 옮겼단다. 팔순 잔치 때 책 300부를 찍어 친구와 친족에게 보내고 남은 책 200여 부를 보관하다 장례에 참석한 이들에게 주었다. 식장 복도의 ‘갤러리’ 역시 막내가 아버지의 자서전을 출간하며 준비해 두었던 이미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지루한 일상을 견디시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찾아온 막내에게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이 행복했을 것이고, 자녀는 아버지를 아버지 이전에 고된 시절을 이겨온 한 남자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눈을 떴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과장 없이 반추하며 한 줄씩 눌러쓴 회고록을 가진다는 것은 아버지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이 책은 장례식의 백미였고, 이후 손주들에게도 좋은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 집 막내가 집필한 아버지의 회고록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당사자인 아버지는 물론 가족과 친지, 문상객 모두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으니 기록문학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낸 셈이다.
책의 사명은 이런 것이다. 목적에 대한 충족이다. 출판계에서 좋은 책이란 많이 팔리거나 오래 살아남는 책이다. 많이 팔리진 않아도 어떤 이들에겐 전설처럼 읽히는 책이 있다.
미국과 유럽의 모터사이클 마니아들이 바이크 입문을 위해 읽는 필독서 중 하나인 《Twist of the Wrist》다. 바이크 운동 원리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과학으로 뒤집은 책이다. 가파른 곡선 길과 빗길에서 라이더의 생존본능이 어떻게 참사를 일으키는가를 증명하며 안전하고 효과적인 라이딩 기술을 일러준다. Keith Code는 이 책을 캘리포니아 바이크 스쿨 수강생을 위한 교재로 만들었다. 그런데 책으로 나오자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은 가뭄에 단비처럼 받아들였다.
이걸 영상으로 만든 것이 《Twist of the Wrist Ⅱ》인데 라이더들은 그냥 “코너링 바이블”이라고 부른다. 바이크를 진지하게 대하는 입문자들은 누구나 보는 영상이다. 물론 지금은 더 고급스럽게 편집된 콘텐츠가 많아졌다. 그래도 라이더들은 이걸 본다. 모터사이클 스포츠의 기초과학이라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이런 책은 좋은 책이다.
최종수의 《새와 사람》도 좋은 책이다. 몇 년 전 ‘새를 지켜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을 때 이 책은 필자를 '탐조 세계'로 안내하는 더할 나위 없는 길잡이였다. 우리나라를 찾는 새에 대한 정보도 풍부하지만, 사람과 새와의 생태 연관성에 대해서도 영감을 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수십 년의 경험이 오롯이 들어간 책은 좋은 책이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던 해였다. 항일투쟁을 조망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는데, 조한성 작가의 《만세열전》이 눈길을 끈다. 많이 알려진 지도자들이 아니라 3·1 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학생들을 한 명씩 소환한 책이다. 이를 위해 조한성 작가는 몇 년에 걸쳐 일제의 범죄기록조서와 재판기록을 조사했다. 많이 팔리진 않았다. 우리가 김구와 유관순, 홍범도를 기억하지만 역사의 엔진을 돌린 주역들은 그저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 부르고 넘어갈 때, 그는 그들의 이름과 헌신을 또박또박 책에 담았다. 대형서점의 MD들은 내용도 좋고 평가도 좋은데 잘 안 팔리는 책을 두고 그저 ‘안타까운 책’이라고 한다.
독자들이 많이 읽지 않았기에, 그 “좋다.”라는 평가조차 보편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이 읽힌 책은 우선 좋은 책일 가능성이 높지만, 좋은 책이라고 많이 팔리진 않는다.” 이 말이 아마도 출판업에서 책을 보는 공통적인 관점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책의 부상과 추락은 그런 이치로 돌아가진 않는다. 우린 지금 들어도 뛰어난 음악인데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뮤지션이나, 획기적인 발명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두고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표현한다.
책도 그렇다. 그 시대 대중의 소비 코드에 따라 책은 뜨고 지고 사라진다. 불꽃처럼 타오르다 휘발되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베스트셀러는 많다. “좋은 책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소비 트렌드다. 하지만 세월을 견뎌 오래 살아남는 책은 분명 좋은 책이다.
'책이 밥 먹여준다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쓰기][꼭 알아야 할 강좌] 출판사에 보낸 원고(투고)가 거절당하는 7가지 이유 (0) | 2023.02.13 |
---|---|
에세이 대세가 된 단어 "치유"와 "힐링" (0) | 2023.02.11 |
출판시장의 오해와 이해 (0) | 2023.02.09 |
베스트셀러, 시류에 앞선 첫 목소리 '오리지널리티' (0) | 2023.02.08 |
욕망과 결핍의 아이콘, 베스트셀러 (0) | 2023.02.06 |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 ③ 이상한 책 (0) | 2023.02.05 |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 ② 나쁜 책 (0) | 2023.02.04 |
책 써서 망했다는 사람 못 봤다 (2) | 2023.01.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