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이 많이 읽힌다는 것은 대중의 욕구를 예리하게 담았거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는 의미다. 책의 시류는 결국 사람과 사 회의 변화에 그 답이 있는데, 이런 걸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인간에 대한 인류의 모든 탐구를 인문학(Humanities)이라 하고 객관세계(자연)에 대한 연구를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이라고 한다. 과거엔 자연과학에 대비해 사회를 탐구한다고 사회과학(Social Science)이라고도 표현했다. 하지만 사회과학이 사회운동을 규정하는 법칙을 규명하는 과학적 방법론인데 여기서 그 ‘과학적’이라는 것이 ‘사회를 인식하는 객관적(물적) 방법론’을 뜻하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이 고도화되고 융합되면서 더는 과거의 규정이 변화를 담지 못하게 된 것. 현재까지도 각 대학에선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개념을 섞어서 사용한다. 정치학, 경제학, 법학, 자본주의 연구 등이 사회과학이라면 인문학은 종교, 철학, 문학, 역사, 심리, 인류사 등 고대에서부터의 인간에 대한 탐구 대부분을 포괄한다.
JTBC의 <차이나는 클래스>, tvN의 <어쩌다 어른>, <알쓸신잡>, KBS1의 <명견만리>, <역사저널, 그날>, CBS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MBC의 <선을 넘는 녀석들> 등등 모두 인문학 채널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 채널은 스타강사를 배출하고 스타강사는 “출판깡패”가 되어, 책만 내면 베스트셀러를 차지한다. 건국이래 우리 국민이 이토록 인문학 공부에 빠져있던 적이 있었나. 누구는 인문학 열풍이 “애플은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접점에 있다.”라고 한 스티브 잡스 때문이라고도 한다.
한국인이 과연 성공에 대한 욕망없이 움직이겠냐는 말인데, 실제로 사업의 성패는 결국 미래에 대한 예측력이고, 이 예측력은 인문학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인문학 강사의 발언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인문학 열풍이 워낙 거세다 보니 회식대신 인문학 강연을 듣게하는 회사도 생겼고, 인문학 도서를 읽고 10분 안에 요약 발표하는 'TED'식으로 조회하는 사장님도 있었다.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미국의 비영리 재단에서 운영하는 강연회를 말한다.
2018년에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퇴근길 인문학 수업》은 이런 사회적 흐름을 반영한 출판이었다. 이후에 도 시리즈는 쉬지않고 나왔는데, 1편 〈멈춤〉, 2편 〈전환〉, 3편 〈전진〉, 4편 〈관계〉, 5편 <연결>에 이어 6편 <뉴노멀>까지. 인문학 집대성의 느낌이다.
2019년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나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 365》 책 역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서브타이틀이 거의 약장수 버전인데, 현대인의 인문학에 대한 욕망을 이렇게 풀어썼다.
“하루 1분이면 세계의 모든 지식이 내 것이 된다.”
2014년 인문교양 부문 베스트셀러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였고, 2017년은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였다. 2014년 4월엔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사회 양극화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던 해였다. 2017년 3월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있었고 그는 박 전 대통령에 탄핵심리가 한창이던 1월에 이 책을 냈다. 이미 2011년 돌베개에서 이미 출판되었던 책이었음에도 시민의 관심이 모두 ‘국가의 미래’에 쏠려 있을 때 개정판을 낸 것이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은 적어도 한 세대 정도의 사회적 변화와 구성원들의 지향점을 담는 말이었다. 물론 시대정신이 금방 바뀐다면 이를 시대정신이라 부를 수 있겠냐마는, 지금은 1~2년 간격으로 짧아진 느낌이다.
인문학 열풍과 함께 ‘치유에세이’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했다》, 《혼자가 혼자에게》,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살고 싶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이유가 많으니 그냥이라고 할 수밖에》, 《위로받고 싶은 날의 보노보노》, 《나는 나대로 살기로 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미움받을 용기》,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말 것》,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등이 그렇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2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치유에세이는 더욱더 많아질 전망이다. 2019년 20대 여성의 자살률은 전년 대비 25.5% 늘었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2020년 1월~8월간 자살을 시도했던 20대 여성은 전체 자살 시도자의 32.1%로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많았다. 2020년 3월에만 여성 노동자 12만 명이 직장을 잃었고 1996년생 여성 자살률이 1956년생 여성에 비교해 7배 높아졌다는 보고가 뉴스를 통해 나왔다. 한국의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느끼는 우울감을 '코호트 효과'라고 분석하는 학자도 등장했다.
2017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다. 170만 부가 넘게 팔렸다. 흥미로운 건 이기주 작가가 출판사 간섭 없이 책을 만들기 위해 1인 출판사를 만들어 낸 책이라는 점이다. 《언어의 온도》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에세이집이다.
2016년 여름에 나온 책이 이듬해 봄에 갑자기 수직 상승해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통상 출판 후 3개월에 90% 정도의 책이 나가고 이후엔 별 볼일 없다는 출판계의 정설을 깨뜨렸다. 《언어의 온도》가 출간되었던 2017년 12월까지의 판매량 중 2016년은 고작 3.3%에 불과했 다.
문단은 물론 출판계에서도 이 책의 판매부수는 미스터리였다. 《언어의 온도》 이기주 작가의 인지도는 물론이고 책의 내용이나 형식 모두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기주 작가의 후속작 《말의 품격》, 《글의 품격》 역시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언어의 온도》는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다.
《언어의 온도》 이후 ‘언어’와 ‘품격’은 출판계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제목에 ‘언어’와 ‘품격’이 들어간 책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광고 카피는 물론 영화와 공연의 제목도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트렌드가 되었고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문단과 출판계에선 지금도 이 책의 대박 기원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 《언어의 온도》와 작가의 프로필에 끌려 읽게 되었다. 글과 문장에 대한 책에 흥미가 많은지라, 사람의 말과 글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고 골랐다.
지극히 개인적 체험이지만, 이후 나와 같은 이유로 책을 읽었다는 이들을 많이 만났다. 책 내용도 그랬지만 나를 끌어당긴 건 ‘저자 소개’였다. 몇 년생에 고향이 어디고 어느 매체를 통해 등단했고 수상경력이 어떤지, 그리고 그 흔한 발문조차 없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쓴다. 가끔은 어머니 화장대에 담담히 꽃을 올려놓는다. 자기소개를 이렇게 과장없이 쓸 수 있다면 내용에도 거품이 없을 것이라 믿었다.
이 책의 폭발적 인기의 원인을 단언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 읽고 두 번 다시 책을 열어보지 않았다. 분명한 건 이 책을 견인한 계층이 30대 여성이고, 인스타그램에서 공유하기 가장 좋은 형태의 단문이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독서 취향에 관련없이 누구에게 선물해 주어도 그럴듯한 아우라를 가진 제목과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늙은 노모에 대한 이야기가 이따금 나오는데, 지친 직장인이 집에 돌아와 날카로운 마음을 치유하기엔 좋은 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난 이 책 역시 ‘치유에세이’로 분류한다.
2019년엔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와 최승필의 《공부머리 독서법》이 가장 많이 팔렸다. 김영하는 훌륭한 작가지만 예능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출연하기 전까지 그의 작품 판매량이 많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TV 출연이 한몫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2018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하태완의 《모든 순간이 너였다》였다. 연애에 얽힌 달콤한 솜사탕 같은 이야기다. 이 역시 같은 해 방영되었던 tvN 드라마 <김비서가 왜 이럴까>를 통해 PPL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최승필의 《공부머리 독서법》은 엄마들 입소문과 어린이집, 독서교사 등 아동교육 관련자들의 추천으로 대박을 낸 책이다. 저자가 아이에게 직접 했던 독서체험 공부교육 이야기를 담았는데, 목적이 뚜렷하다. 바로 공부다.
베스트셀러 저자나 출판 담당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 정도로 뜰 줄은 몰랐다고. 반대로 대박이 날줄 알고 큰 금액으로 판권을 사들였던 해외 소설이 중박도 못 터뜨린 경우도 허다하다.
폄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베스트셀러는 뛰어난 문학성이나 정보의 함량, 문장력이나 놀라운 체험 이런 것과는 거리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은 상품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책 역시 소비문화의 정점에 있다. 책은 문화상품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대중의 소비양상 또한 문화로 접근해야 한다. 당시 트렌드를 형성한 책을 보지 않으면 계층의 문화 흐름에서 이탈한다는 생각을 갖는 독자층이 있고, 또 특정 책을 사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더 세련되거나 지적이라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다.
단편소설은 심각해서 마음이 무겁고 장편을 읽기는 부담스럽고, 딱딱한 내용엔 눈길을 주지 않았던 독자가 영화를 보러 갔다가 극장 아래층의 서점에서 책 한 권을 고른다면 쉬운 에세이 아니면 대중적 시어를 구사하는 인기작가의 시집, 혹은 재미있는 인문학 서적일 가능성이 크다. 방송이나 유튜브에 자주 출연했던 저자라면 더 유리할 것이다.
2000년대 들어 해마다 가장 많이 팔린 책 리스트를 보면 책이 유행을 타고 있다는 것을 읽게 된다. 시대의 휘발성 있는 트렌드이거나, 남들은 보지 못했던 아픈 상처거나, 숨기지 못하는 강렬한 욕망의 '시류'다. 시류는 파도와 같아 밀물이 있고 썰물이 있다. 하나의 시류를 다른 트렌드가 덮으며 전진하는 것, 그것이 출판시장이다.
시류를 읽어 유사한 책을 따라 하는 것을 '아류'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느끼는 결핍감과 사회의 벽에 부딪히는 소리에 반응해 첫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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