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82년생 김지영》이 나왔다. 조남주 작가는 기존에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은 등단 작가였음에도 민음사의 일반 투고창을 통해 투고했다. 원고의 형식이 새롭고 여성의 경력단절이라는 소재도 당시에는 참신했다.
원고가 좋다고 판단했던 편집자는 회사에
“1만 부, 자신 있습니다.”라고 기안을 올렸고,
“한두 번도 아니고, 뻥 좀 그만 쳐라.”는 임원의 답변을 들어야만 했다.
결국 목표 판매량을 8,000부로 낮춰 올렸다고 한다.
국내에서만 130만 부가 팔렸고, 대만에선 전자서적 1위, 중국에선 나오자마자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일본,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17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동명의 영화는 367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민음사에 따르면 한국소설의 판권을 사기 위해 유럽의 출판사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출판 프로젝트’까지 상세히 공개하며 정성껏 로비하는 모습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한다.
미국 타임지(TIME)는 ‘2020년 꼭 읽어야 할 책 100’에 이 책을 올렸다.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가 3만 부를 넘기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2007년 《칼의 노래》, 2009년 《엄마를 부탁해》 이후 9년 만에 나온 밀리언셀러다.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이었지만 빠르게 정치화되었다. 이 책에 대한 안티테제(反定立)로 《82년생 김지영 그리고 90년생 김지훈》이 나왔고 인터넷에선 《92년생 김지훈》 등이 미러링 되었다. 동명의 영화가 개봉하고 책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거셀수록 책은 역주행해 베스트셀러를 탈환하는 기염을 토했다.
작품에 분노한 남성들은 김지영의 환경은 너무나 구시대이며 비현실적이라며 제목을 《62년생 김지영》으로 하는 것이 옳았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늘 가장 첨예한 갈등과 심각한 모순에 놓이도록 설정한다는 것을 참작하면 소설을 다큐로 받아쳤다는 느낌이 적지 않다.
책에 대한 평단의 반응도 갈렸다.
“캐릭터가 보편적이고 균질적이어서 지나치게 당대 여성의 삶을 일반화했다.”는 평가와 함께,
“작품 속 여주인공은 수동적이며 답답한 골방에 갇혀 파괴되었지만, 작품을 본 사람들을 행동에 나서게 했다.”는 등.
저자가 써서 보낸 원고의 원래 제목은 《820401, 김지영》이었다. 1982년 4월 1일, 그러니까 만우절의 농담만큼 가볍게 태어난 여자 아이다. 제목을 두고 남성 편집자가 낸 아이디어는 《여자사람, 지영》이었단다.
《82년생 김지영》은 태아감별이 역대로 심각해 많은 여아(女兒)가 낙태되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를 살아온 80년대생 여성을 상징하는 제목으론 손색없어 보인다.
작가 조남주는 1978년생이다. 2015년 12월에 민음사는 투고를 받아 출판을 결정했는데, 책이 출간된 2016년은 강남역 살인사건에 이어 한국의 ‘미투운동’이 거세게 타올랐던 시기다.
책의 내용이나 작가의 태도에 대해 다른 입장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100만 부 이상 팔린 책이 의미 없는 목소리일 리는 없다. 주 고객층은 20, 30대 여성들이었지만 초기엔 부부가 함께 읽는 사례도 많았고 남성들의 반응 역시 좋았다. 책이 남녀 대결의 이슈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판매목표가 8,000부였다는 건 에디터의 통찰이 짧았다는 말 아닐까. 하지만 출판사의 추정은 합리적이었다. 조정래 작가 반열의 국민작가의 대하소설이 아닌 이상 소설이 1만 부 팔리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던 시절이다. 지금은 5,000부도 많이 나간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분명한 건 민음사라는 대형 출판사의 통밥으로도 가늠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아닐까?
난 그것을 감춰진 대중의 열망이라고 본다.
얼음장 밑에선 강력한 담론으로 역동하고 있는데 표면에서 아직 미미하게 보이는 이슈를 정밀하게 대변하는 작품이 나오면 대중은 열광한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말하기 어려울 뿐이다.
대중문화와 사회의식의 변화지점을 정확히 포착하는 능력, 엄밀히는 반걸음 앞에서 예비하는 능력, 이런 것이 출판인의 통찰력 아닐까?
개인적으로로 《82년생 김지영》을 사례로 든 이유는 작품의 사회적 성격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모든 작품은 저자의 의도와 관련 없이 사회적 맥락 아래 읽힌다. 즉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시대의 변화, 세태의 목소리,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 특정 집단의 움직임 등 모든 것이 출판의 목적과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1993년에 300만 부가 팔려나간 소설이 있었는데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다. 이듬해 만화가 이현세의 《남벌》이 종이 만화로는 이례적으로 주요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남북합작으로 핵을 개발해 일본을 굴복시켜서 동북아 질서를 재편한다는 내용이고, 《남벌》은 한국이 북한의 미사일 전력을 이용해 일본을 징벌하는 내용이다. 당시 청장년층을 중 심으로 번졌던 ‘이제는 당하지 않는 강한 대한민국’이라는 애국주의 열망을 직설적으로 활용한 작품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6.3%였던 것에 반해 일본은 2.5%로 ‘버블 붕괴’라는 경제추락을 계속할 때였다. 1994년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발해를 꿈꾸며>가 젊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국 남성들의 열망은 계속 이어졌다. 1999년, KBS는 <역사스페셜; 추적! 환단고기 열풍>을 방영했다. 대부분의 사학자가 편성을 만류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고 강력한 비판이 이어졌다. 제작진은 해당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시청자 게시판을 몇 년째 압도적으로 달군 방영요청이 바로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상고사 <환단고기>’를 다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 대학생의 보편적인 목표가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이고 직장인의 꿈은 건물주인데, 이건 뚜렷한 욕망이다. 이 이슈를 부동산 정책이나 사회 양극화로 가져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고, 무한경쟁에서 부속품처럼 마모된 이들에게 위안과 치유를 주는 책도 있다.
평생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임금소득으로 연명하지 않기 위해 ‘개인 재정독립’을 위해 금융 소득자로 살자고 추동하는 책도 있다.
2030 동학개미들의 적극적인 주식 투자와 부동산 열풍을 단순히 황금만능주의로 받아들이면 변화의 핵심을 잘 못 읽은 것이다. 결국 20년 전부터 세계인의 화두가 되었던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다.
“착한 삶 vs 나쁜 삶”
“성공한 삶 vs 실패한 인생”
이런 이분법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가진 것을 최소화하고 소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미니멀라이프(minimal life)와 청년 주주운동이 각기 다른 지향을 가진 것은 맞지만, 자본과 임금노동이라는 보편적인 고용관계의 사슬을 끊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은 같다.
서점의 평대엔 자존감이 떨어진 임금노동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에세이가 쌓이고, 바로 옆엔 투자 귀재들의 자기계발서가 팔리고 있다.
많이 팔리는 책은 구성원의 결핍이라는 싱크홀과 사회의 욕망이라는 분화구, 이 두 가지를 다룬다.
근거리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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