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 무라카미 하루키(むらかみはるき, 村上春樹)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에서
“작가님의 원고를 검토했지만,
우리 출판사의 편집 방향과는 맞지 않아
진행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런 답신을 받으면 투고한 저자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일 것이다.
왜, 무엇이 부족해서 안 되는지 일러주기라도 하면 방향이라도 수정할 텐데 말이다.
웬만한 중견출판사의 에디터는 매일 20여 개 이상의 투고를 받고 빛의 속도로 걸러낸다. 메일의 첨부파일조차 열지 않을 때도 허다하다. 출판제안서(기획안)만 읽어봐도 저자의 기초소양이 대부분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디터가 원고를 꼼꼼히 읽을 정도라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다수의 원고는 그 자체로 함량 미달이다. 이때, 출판사 에디터는 그 원고를 왜 책으로 만들 수 없는지 작가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굳이 정성을 들여 불편한 관계를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정성껏 만드는 책은 대부분 기획출판물이다. 출판사에서 작가를 섭외해 테마를 제안하면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출판사는 기획출판을 통해 매출을 노린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크고 함량이 떨어지는 투고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출판 일정이 가득 차 있다면 굳이 투고받은 원고를 뒤질 필요가 없다. 지명도 없는 작가가 첫 책을 내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은 이유다.
그렇다면 원고들은 왜 에디터의 손에서 잘려 나가는 걸까. 세계적으로 5억 부 이상 팔려나간 《해리포터》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 링(Joan K. Rowling)조차 원고를 12곳으로부터 거절당한 끝에 성공했으니, 결국 편집자의 안목이 문제였을까.
《해리포터와 현자의 돌》을 한 작은 출판사가 내기로 했을 때, 조앤 K. 롤링에겐 복사할 돈조차 없어 원고를 모두 타이핑해서 출판사에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초판은 500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볼로냐 아동도서전(Bologna Children's Book Fair)에서 스콜라스틱 출판사의 편집자 아서 레빈이 이 책에 꽂혔다.
스콜라스틱은 아동도서와 교과서 등을 만드는 미국 출판계의 큰 손이다. 책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인의 혼을 빼놓았다. 이런 스토리를 듣다 보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보수적인 에디터가 작가의 앞길을 막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당신의 원고가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유망하지 않다고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투고는 출판 편집자에게 유망하지 않게 보인다. 왜 그럴까.
1. 당신이 원하는 책인가? 독자들이 원하는 책인가?
문학이나 인문·교양서적은 다르겠지만, 상당수의 초보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쓰려한다. 에세이나 자기계발 분야 투고가 상당히 많은데, 결국 작가의 경험과 사유의 깊이가 걸림돌이 되곤 한다.
누가 봐도 특별하지 않은 세계여행 경험이나 부모님과 다시 손을 잡는 과정, 은퇴 후 창업 실전 이야기를 아무런 차별성없이 써서 투고하는 경우다.
이미 더 특별한 작품이 바람을 탄지 오래고 비슷한 테마의 책이 많다면 출판사에선 그 원고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은 애틋하고 경험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출판은 사회적 영역이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도 유용하리라는 법은 없다. 소설가들이 가장 진부하게 생각하는 말이 있다.
“내 얘기를 책으로 내면 소설책 몇 권은 나온다.”
연륜 높으신 어르신의 말씀이다.
위인전이나 자서전이라면 맞는 말씀이지만 소설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2. 책은 글을 모은 것이 아니다!
책 만들기는 글과 달라 좋은 글을 모아 엮는 것이 아니다. 책을 만드는 일은 하나의 콘셉트로 원고 전체를 관통하며 변주를 통해 울림을 주는 작업이다.
‘밤’과 관련된 책들을 보자.
크리스토퍼 듀 드니(Christopher Dewdney)의 《밤으로의 여행》,
황현산 작가의 《밤이 선생이다》,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의 《밤의 역사》,
이 책은 모두제목에 ‘밤’이 들어갔지만, 실제 내용은 매우 다르다.
《밤으로의 여행》이 밤과 연관된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풀어냈다면, 《밤이 선생이다》는 그야말로 제목에만 '밤'이 들어간 출판사의 기획 출판물이다.
《밤의 역사》는 인류 어둠의 역사를 살펴 그 연원을 추적하는 미시사학의 인문서다. 황현산 작가의 산문집을 제외하곤 모두 하나의 테마에 따른 변주로 구성되어 있고,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책이 콘셉트에 따른 일관성을 유지하는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나의 테마로 300쪽 분량의 책을 쓸 수 있다는 건 방대한 지식을 하나로 엮을 만큼의 전문성과 내공을 지녔다는 의미다.
《총, 균, 쇠》, 《원소의 세계사》, 《사피엔스》, 《코스모스》와 같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는 거의 평생에 걸친 연구와 탐색이 담긴 결과물이다.
물론 황현산 작가의 《밤이 선생이다》는 훌륭한 철학 산문집이다. 그는 문학평론을 통해 미학 언어를 다듬어 왔다. 대중을 위해 처음 내놓은 책이 《밤이 선생이다》인 셈이다. 평범해 보이는 산문집이지만 여기엔 황현산 작가만의 콘텐츠, ‘문학의 언어로 사회 읽기’라는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3. 운전면허시험집의 효능감은 있는가?
작가가 ‘아무말’이나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 있다. 주로 산문집이나 에세이에서 이런 문제가 많이 발견된다.
최근 20, 30대 여성과 경력단절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가 인기를 끌자 출판사에 투고되는 ‘유사원고’도 봇물이 터진다. 블로그에 밤에 읽으면 좋을 말랑말랑한 문장을 연재했는데, 인기를 끌자 출판사는 이를 책으로 냈고, 바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흔글(조성용) 작가의 《무너지지만 말아》가 대박을 치자 출판사는 콘셉트가 유사한 작품 3종을 묶은 한정판 스페셜 에디션을 출판했다. 《새벽 세시 + 무너지지만 말아+새삼스러운 세상》세트다.
앞으로도 SNS를 통해 책이 기획되는 일은 더욱더 많아질 테지만 특정한 시류가 지속되긴 어려울 것이다. 희소성이 사라지면 독자들은 피로하고, 필력 있는 작가들이 너나없이 출판사와 손잡고 유사한 콘셉트의 책을 내면 흐름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책을 구매할 독자는 누구이며, 책의 효능은 무엇인가에 대해 간단하게 답할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운전면허시험집’만큼 타깃이 뚜렷하고 효능감을 주는 책이 없다. 대상은 응시생이고, 한 권만 풀어도 필기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그 '효능감' 말이다.
4. 좋은 문장가도 어쩌지 못하는 사유의 게으름!
예전에 한 지인의 부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원고를 선별해 편집해주는 일을 한 적이 있다. 우습게도 원고를 부탁한 이는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등단한 작가였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남의 원고만 손질하다 막상 자신의 산문집을 내려니 여간 갑갑한 게 아니었단다. 나는 그가 보내온 원고 중 2/3 가량은 사용하지 못할 것 같다고 답했다.
1/3은 앞서 언급한 문장의 유려함 뒤에 감춰진 메시지의 진부함 때문이었다.
적어도 “겨울을 견딘 씨앗만이 땅심을 얻어 줄 기를 올릴 수 있다.”는 식의 식상한 채근담이 독자에게 줄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나머지 1/3의 원고였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방식이 부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부 꼭지는 사람이 불행함을 느끼는 이유를 사회적 관계의 단절이나 상품소비가 삶의 전부로 느끼는 물신주의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상관관계(相關關係)일 뿐 인과율(因果律)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이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원인과 삶의 이치가 그렇게 단순할 순 없다.
‘무소유’의 생활을 일관되게 실천하신 법정스님의 에세이였다면 깊은 울림을 주었을 터지만 생계를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티다 사회적 관계가 붕괴되고, 초라한 소비로 잠깐의 행복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겐 무료한 이야기다.
‘아픈 현실에 대한 게으른 진단’만큼 듣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일이 있을까. 작가의 영혼이 나이와 상관없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문학의 사명과도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문학의 사명은 무뎌져버린 사회의 굳은살을 파 드러내 통증을 느끼게 하고 각성시키는 작업이다.
5. 탄탄한 문장력과 호흡은 필요조건!
글솜씨가 좋다고 좋은 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콘텐츠라도 문장과 호흡이 형편없으면 10쪽을 넘기기 힘들다.
‘독서근육’이 잘 발달된 독자들은 출판사의 서평이나 리뷰를 먼저 보지 않고 목차와 저자의 출판 이력, 무엇보다 인용한 문장을 확인하며 책의 토대가 튼튼하지를 확인한다.
즉, 단단한 문장력은 좋은 책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일 뿐이다.
6. 제목(가제)과 목차만으로도 호기심을 부르는가?
상당수의 투고가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제목과 목차가 낡았기 때문이다. 제목과 목차 구성이 밋밋한 이유는 작가의 집필(사유)력이 일정 단계에 멈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차를 보면 하품이 나오고 원고 한 문단을 읽기 어려운 원고는 퇴짜를 맞는다.
출판사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이는 부분이 제목과 부제, 표지 디자인이다. 실제로 3천 부 수준에 그쳤던 책이 다른 출판기획자를 만나 개정판으로 거듭나면서 역주행에 성공해 베스트셀러에 진입할 때가 있다.
대부분 제목과 표지를 바꾸는 리커버 작업을 하고 마케팅 방향도 달리한 사례다. 당연히 편집자들은 제목과 목차를 보며 이게 물건인지 아닌지를 본다.
박준 작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_ 혜민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 보기,
류시화 작가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허완 작가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_ 야매 득도 에세이,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_ “자기가 지금 힘든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이유 없는 허전함에 시달리면서”,
이원하 작가의 《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조원재 작가의 《방구석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_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레몬심리의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_ 기분 따라 행동하다 손해보는 당신을 위한 심리 수업
제목은 독자의 시선을 잡아끌고 의미를 확장한다.
부제는 책의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물론 출판기획자들은 콘텐츠만 좋으면 책은 잘 팔린다고 한다.
하지만 인지도가 높지 않은 작가의 책이라면 제목이 안 좋은데 잘 팔리지는 않는다.
7. 서점에 이미 차고 넘치는 이야기는 아닌가?
책을 출판하는 것은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짝퉁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이미 출간된 동류의 책을 모두 통독하는 것이 좋다. 아마 꽤 팔린 책들의 특성을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뾰족함.
그러니까 좁은 각도에서 특색을 부여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출판 시류에 가장 민감한 이들이 출판사 편집자들이다.
편집을 통해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작품이 있고, 바닥이 금방 보여 고쳐 써도 어쩔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유사 장르의 책에서 보이는 아쉬움으로 내가 쓰면 이보단 맛나게 쓰겠다 싶으면 참 좋은 테마를 잡은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다른 책에서 더 뛰어 난 방식으로 하고 있다면 원고 기획의 방향은 달라져야 한다.
특정 분야를 파기 위해 공부할 때 한 권만 사서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정보를 얻기 위해 샀던 책이 함량 미달의 짝퉁이라면, 당혹감은 이내 배신감으로 변한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진실의 리뷰’ 몇 편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출판 가능성이나 원고에 대한 평가는 사실 출판사 편집장에게 듣는 것이 가장 좋다. 그들은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출판된 책 10권 중 4권이 반품창고에서 썩어가고 있기에 시류를 탄 작품은 유행의 끝물이라며 거절하고, 이색적인 작품은 확장성이 없을 것 같다며 마다하기도 한다.
책의 명운에 대해선 그들이 틀리는 적이 많지만, 적어도 해당 원고가 책으로 출판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인지는 귀신같이 안다. 출판사에서 기획방향을 틀어 재편집하자고 제안하는 원고는 이미 출판의 씨앗을 품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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