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현혹하는 문장론
멋진 문장의 조건이나 잘못된 표현, 즉 ‘문장’과 관련해선 훌륭한 시인과 소설가가 내놓은 안내서가 많다. 이 글은 문장과 문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잘못된 글쓰기 습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내용을 나누고자 한다. 우선 글쓰기에 대한 아래의 조언을 보자.
1. “표현의 우수성은 명료함에 있다.”
2. “형용사는 작가의 감각이나 개성과 가장 밀착해 있기 때문에 낡기 쉽다.”
3. “간결한 문장은 아름답고 간결로 인해 긴장하게 된다.”
4. “어떠한 미문도 이해에 방해가 된다면 비속한 졸문만도 못한 것이다.”
5. “주어를 앞으로 끌어내고 능동체로 써라.”
6. “복합문장이라면 나눌 수 있을 만큼 나누어 따로 써라.”
위의 조언 중 1번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것이고, 2번 형용사에 대한 조언은 일본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平岡公威)가 한 말이다. 나머지도 모두 세계적인 작가들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나온 책들은 모두 간결하고, 문장배합도 AI가 섞은 듯 자연스럽다. 심지어 한 문단을 7~10줄 안에 밀어 넣는 글쓰기 기술도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다양한 문장에 대한 주장이 있지만, ‘짧고 간명하게 쓰라.’는 조언이 가장 보편적이지 않을까.
<중동항로와 관련된 특이사항> |
이슬람 최대 명절 중 하나인 라마단이 지난 8월 18일에 끝났습니다. 따라서 중동 항로의 거래량과 실재 적재 비율이 다시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라마단 직전의 실재 적재 비율은 95%에 육박했습니다. 또한 중동 항로 선사협의체에서는 2012년 7월 중 컨테이너 당 300달러의 성수기 할증료를 부과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유예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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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항로 관련 이슈> tvN. 2014. 11. 22. <미생> 11회. |
라마단(2012.7.20~12.8.18) 종료에 따라 중동항로 물동량 및 소석률 회복이 예상됨. IRA가 7월 중 적용 예상이던 PSS(USD 300/TEU)를 유예함. |
2014년 tvN의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은 이런 주장에 설득력을 더했다. 자신의 뛰어난 스펙에 걸맞은 중량감 있는 업무를 원하는 신입사원에게 상사는 도리어 ‘문장 줄이기’ 훈련을 시킨다.
이 장면을 본 기업의 대표이사들이 무릎을 쳤다. 직원들에게 향후 보고서를 A4용지 반 장에 축약해 보고하라고 했다고 한다. 《미생》의 이 장면은 약어가 업무용으로 정착되어 있고 단순 정보만 보고할 땐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중요한 수억 원 대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만난 계약 당사자와의 면담 결과도 이렇게 보고할 수 있을까?
우리 측 제안에 부정적.
계약 조건은 경쟁사보다 우월하지만 입찰 경험과 회사 규모를 문제 삼음.
다음 미팅 제안도 거부.
중요한 면담을 하고 돌아와서 이런 두 세 줄짜리 보고문을 올린다면 상사는 황당할 것이다. 상대측 회사 면담자는 누구였는지, 그가 결정권을 가진 자였는지, 경쟁업체와의 관계는 어떤지 등이 궁금할 것이다. 또한 계약거부 사유가 회사의 자금력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사업 경험 때문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 따른 대책도 궁금할 것이다. 즉 객관보고의 형식으론 단문이 우월할지 모르지만 원인과 결과, 문제와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한 보고엔 적합하지 않다.
단문으로 쓰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훈련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체언+용언으로만 이루어진 구조가 가장 힘 있고 단순하며 명확하다. 그랬을 때 부사와 형용사, 그리고 연결 문장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글의 본질적 내용과 부차적 수식을 가려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 작가의 문장은 독특하다. 그의 문체를 익히기 위해 필사(筆寫)하는 이들도 보았다. 아래 글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일부다.
산 자들이 죽은 자의 구덩이를 팠고, 죽어서 거기에 묻혔다. 종사관 김수철이 사망자 명단을 작성했다. 연고가 있는 자들은 고향에 통보해주었고 연고를 찾을 수 없는 자들의 명단은 도원수부에 제출했다. 소한 추위가 닥치고 나서야 이질은 기세를 죽였다. 다시 우물을 열었다.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 |
군사와 백성이 굶어 죽을 때에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는 주인공의 심정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객관적 서술만으로도 비정한 전상(戰狀)과 장군의 심정은 더 아프게 드러난다.
주어와 목적어를 뚜렷이 둔 간결한 문장이다. 동사를 위주로 능동체로 쓰고 내면을 드러내는 형용사를 극단적으로 자제한 그의 문장은 일품이다. 김훈은 뛰어난 문장가이지만, 그 이전에 낱말의 뜻에 정통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때때로 김훈의 문장을 흉내 내는 듯한 에세이나 여행기 등을 접하게 되는데, 내용과 형식이 계속 충돌해 읽는 동안 불편하고 짜증까지 나는 책이 있다. 남 따라 하다간 제 스타일을 죽인다.
김훈 작가가 왜 이런 문체를 구사했는지에 밝힌 내용이 아래에 있다.
전병근. <[강연] 작가 김훈 "나는 왜 쓰는가">. 조선비즈(2014. 11. 1). |
소설에서의 문장은, 첫 문장이 힘이 있어야 한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의 힘은 간단명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어+동사’다. 아름다운 수사학에서 힘이 나오는 게 아니다. ‘주어+동사’의 놀라움이 거기에 있다. 나는 그걸 이순신에게서 배웠다. 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난중일기,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 그런 데서 배웠다. 이것은 군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장이다. 문인이 아니면 범접할 수 없는 주어+동사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유의 세계, 결단력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를 많이 죽인다. 7년 동안 120번 정도의 군법을 집행한다. 죽이지 않으면 곤장을 치고 감옥에 보내고 강등시켰다. 군율을 어겼을 때에도 ‘거듭 군율을 어겼다, 군율을 어겨 베었다.’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지저분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군율을 어겨 베었다.’고 썼다. ‘목을 잘라서 성문에 걸었다.’ ‘오늘 남원이 함락됐다는 보고를 들었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있었다.’ 이런 단순성이 갖는 문장의 힘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문장의 힘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두어 페이지 넘어가면 이 힘이 빠진다. 그럼 또 강한 문장을 갖다놔야 한다. 그럼 거기에 의지해서 십여 줄이 나가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힘찬 문장을 박아놔야 한다. 문장 하나 가지고 오래 가지를 못한다. 첫 문장으로 끝까지 우려먹고 살 수는 없다. |
작가의 사유방식과 작품의 분위기, 이를 담는 그릇인 문장을 분리해서 보긴 어렵다. 우린 이를 문체라 한다.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라는 조언이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 독자들의 성향을 간파한 것이고,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장구조를 권한 것이다. 문장을 간결하게 사용하는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면 다음 문장은 어떠한가.
이문구. 《공산토월》. 문학동네. (2018). 273p. |
황소바위 가장자리에 다래가 여물고, 터져 눈송이로 핀 목화대 틈으로 해설피 반짝이는 서릿바람 그림자가 얼룩질 때, 반지르르 살진 검은 염소는 개랑둑 실버들가지 밑에서 잠들고, 구름 아래에 머문 솔개 한 마리가 온 마을을 깃 끝으로 재어보며 솔푸데기 틈의 장끼 우는 소리를 엿들을 때, 범바위 앞의 찔레덩굴 속에서 핏빛 짙은 옻나무 잎을 비켜가며 까치밥을 따먹던 나는 언젠가도 한번 들은 바 있는 신서방의 울부짖음에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다. |
북한에 벽초 홍명희가 있다면, 남한엔 명천 이문구가 있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다. 이문구를 발탁한 스승 김동리는 청년 이문구를 두고 “우리 문단에 가장 독특한 스타일리스트가 나올 것”이라 했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학과장이었던 그는 이문구의 습작품을 학부생들의 시험문제로 내놓기도 했을 정도다.
그의 문장은 굉장한 만연체요, 충청도 사람이 들어도 모를 변산 쪽 옛말을 구사하기도 했다. 《관촌수필》을 읽다 보면 충청도 옛사람들의 어법이 이 문구의 화법과 너무나 꼭 맞아떨어져 감탄하게 된다. 김지하를 비롯한 당대 시인들이 그를 흠모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음은 성공회대학교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중 일부다. 현재 7권까지 나온 이 책은 《로마인 이야기》를 히트시켰던 한길사의 기획출판이다.
김명호. 2013. 《중국인 이야기 2 “붓은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총은 붓 역할을 못 한다.”》. 도서출판 한길사. 39p. |
황류솽이 모습을 드러내자 수백 대의 카메라가 펑펑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불을 뿜었다. 막 30대에 들어선 중국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는 온갖 포즈를 취하며 매력을 뽐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지고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머리카락이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며 난리들을 치는 바람에 팔다리 부러지고, 머리통 깨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깔려 죽은 사람은 없었다. “설중매(雪中梅)를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며 눈 오는 날 산속을 헤매다 얼어죽거나 맹수에게 물려간 시인묵객(時人墨客)을 수없이 배출한 민족의 후예들다웠다. 이튿날 아침, 퍼스트레이디 쑹메이링은 보던 신문을 집어던졌다. “구웨이진, 린위탕 할 것 없이 모두 주책바가지들”이라며 혀를 찼다. 악연의시작이었다. |
김명호 교수는 전업 문인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40년 가까이 중국을 놀이터 삼아 연구한 학자다. 그의 문장은 대부분 입말로 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그는 “일단 써놓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면 된다는 마오마오쩌둥. (毛澤東)의 문장론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데, 이게 말이 쉽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하면서 깨달았다.”라고 밝혔다.
문장의 스타일이 완성되면 이를 문체라 하고,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 문체는 작가와 작품의 독자성(정체성)을 완성한다. 그렇기에 좋은 문장은 짧은 것, 좋은 글은 쉬운 것이라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유려한 만연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장르나 장면이 있고, 강한 문장이 이끄는 가쁜 호흡으로 숨이 멎는 전장(戰場)을 기록할 때가 있
는 법이다.
쉽게 쓴 책도 있지만,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 여러 번 생각하게 만드는 책도 있는 법이다. 《중국인 이야기》는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비유도 평범하지 않고 호흡과 문장배치 역시 입말을 닮아 매우 뛰어나다. 《중국인 이야기》 전권을 읽다 보면, 그의 스타 일이 이미 구축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퇴고를 통해 원고를 다듬는다고 기계적으로 편집언어와 문장을 따르다 보면 정말 좋은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국어 교사들이 콕 집어내는 실수는 안 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개성도 사라질 수 있다.
좋은 문장이나 어법에 대한 권고를 절대적 지침으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런 맛이 없는 작가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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